동래시장 '송공단비'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부산 정신의 표상 임진왜란 순절자 기려
![]() |
▲ 동래시장 송공단 단비들. 임진왜란 동래읍성 전투 순절자들을 기린다. 왜군에게 길을 내어 주는 대신 죽음을 택한 부산 정신이 '버번쩍거리는' 곳이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
단비(壇碑)는 제단에 세운 비.
부산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제단이 네 군데다.
송공단과 정공단, 윤공단, 그리고 의용단이다.
동래시장 송공단(宋公壇)은 동래부사 송상현과 순절한 이들을 기린다.
좌천동 정공단(鄭公壇)은 부산진첨사 정발과 순절한 이들을, 다대포 윤공단(尹公壇)은 다대진첨사 윤흥신 형제와 순절한 이들을, 수영 의용단은 수영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쳤던 25인을 기린다.
제단마다 사연 절절한 비석이 모셔져 있다.
4회에 걸쳐 부산의 단비를 소개한다.
송공단(宋公壇)은 네 제단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졌다.
동래부사 이안눌이 1608년 동래읍성 남문 밖에 전망제단(戰亡祭壇)을 설치한 게 효시였다.
남문 밖은 송상현 시신을 임시로 매장했던 곳이다.
전망제단이 초라하다고 여겼던 동래부사 김석일은 1742년 송상현이 순절한 정원루 터에 동서남북 네 개의 단을 쌓고 명칭도 송공단으로 바꿨다.
송공단 단비는 열다섯. 단에 모시지 않은 비석도 하나 있다.
단에 모시지 않은 것은 임란 순절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송공단 경내에 둔 것은 순절자 못지않게 큰일을 해냈단 의미다.
관노 철수와 평민 매동을 기린 비로 다음에 따로 소개할 기회가 있지 싶다.
일단 단비는 열다섯.
앞줄 11기는 남자 순절자를 기리고 왼쪽 뒤편 별단 4기는 여자 순절자를 기린다.
부산의 단비 중 최초 설립
송상현 동래부사 비롯
이름 모를 백성까지 모셔
모두 15기…4기는 여자 비석
단비는 언뜻 봐도 조금씩 다르다.
자세히 보면 단 높이가 다르고 비석 높이가 다르다.
단과 비석이 가장 높은 것은 충렬공송상현순절비다.
다음으로 높은 것은 송상현순절비 오른쪽 노개방과 조영규 순난비다.
두 사람 다 신분이 높았다.
노개방은 동래향교 교수였고 조영규는 양산군수였다.
두 사람은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택했다.
노개방은 귀가했다가 비보를 듣고 성인들 위패를 지키려고 부랴부랴 입성했으며
조영규는 양산에서 군사를 이끌고 입성했다.
![]() |
송공단 왼쪽 뒤 별단에 모신 단비 네 기. 임란 때 순절한 여인들을 기린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
송산현순절비 왼쪽 비석 8기는 크기가 다 같다.
크기는 다 같아도 단 높이는 조금씩 차이가 난다.
왼쪽 첫 4기와 다음 3기, 그리고 마지막 1기의 단 높이가 다르다.
왼쪽에서 단이 가장 높은 첫 4기는 김희수, 송봉수, 양조한, 문덕겸 순난비다.
김희수와 송봉수는 송 부사를 경호하다 함께 순절한 군관이며 유생 양조한과 문덕겸은 노개방과 같이
성인들 위패를 지키다 순절했다.
동래 출신 조선 시대 화가 변박이 그린 보물 제392호 동래부순절도에는 유생 차림으로 2층 누각을 응시하는
세 사람이 보인다.
다음 3기는 중간 높이.
김상과 송백, 그리고 신여로 순절비다.
평민 김상은 지붕에 올라가서 기왓장을 내던지며 저항하다 순절했다.
송백은 향리로 두 사람이 있어 대송백, 소송백으로 불렀다.
군관 김희수·송봉수 등 사오 인과 향리 대송백·소송백, 관노 철수와 부민 매동 등이 송 부사 좌우에서
부사를 지키다가 희수·봉수·대송백 등은 격투하다가 죽었다.
철수와 매동은 뜻을 이루려고 포로가 되었다.
뜻이 뭔지는 다음에 소개할 비석 음기에 자세히 나온다.
서얼 신여로는 '늙은 어머니를 모셔라'는 송 부사 지시를 따르려고 집으로 가다가 동래성 함락 소식을 듣고선
되돌아가 함께 죽었다.
맨 끝 한 기 제액은'동시사난민인위(同時死亂民人位).' 당시 순절한 이름 모를 백성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뒤편 별단은 여자 순절자를 모신 별단.
비석은 4기다.
의녀위(義女位) 2기와 금섬순난비, 동시사난부녀위다.
두 의녀는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깼고 김상은 이를 받아 적에게 던졌다.
변박 동래부순절도에 지붕 두 의녀와 김상이 나온다.
충렬사지에도 언급돼 있다.
'적이 떠난 뒤에 김상 어머니가 가서 보니 아들은 두 여인과 함께 죽어 있고 적 3인이 또한 그 옆에 죽어 있어서
김상이 죽인 것을 알 수 있었다(적거상모왕시지 상여이녀동사 적삼인역사어기측 지위상소살야, 敵去祥母往視之 祥與二女同死 敵三人亦死於其側 知爲祥所殺也).'
기생 금섬은 적들이 떼 지어 송상현에게 달려들어 해치는 것을 보고서 적을 꾸짖었다.
사흘간 꾸짖다가 살해되었다. 동시사난부녀위는 임진동래전투에서 순절한 모든 여성을 모신 비석이다.
부산정신은 전사이 가도난(戰死易假道難)이다.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이다.
길을 빌려주는 대신 죽음을 택한 이들을 모신 송공단과 비석들. 부산정신이 번갯불처럼 '버번쩍거리는' 곳,
거기가 송공단이고 송공단 단비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송공단 단비 관직 따라 단, 비석 높이 달라
송공단 단비는 관직에 따라 단 높이가 다르고 비석 높이가 다르다.
동래부사 송상현 단비가 가장 높고 그다음이 동래향교 노개방과 양산군수 조영규다.
그들보다 관직이 낮거나 관직이 없던 자는 단도 비석도 낮다.
조선 시대 철저했던 위계질서는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적용되었다.
부사와 향교, 군수는 어느 정도 관직이었을까.
부사는 도호부사의 준말. 통상 종3품 당하관이 맡았다.
그러나 동래는 국경 요지였기에 정3품 통정대부 당상관이 부사를 맡았다.
통훈대부는 같은 정3품이었지만 당하관이었다.
정3품 통정대부에서 정1품 숭록대부까지 당상관이라 했고 정3품 통훈대부에서 종4품 조봉대부까지 당하관이라 했다.
그 아래 정5품에서 종9품까지는 참상과 참하로 나누었다.
당상관과 당하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임금 주재 회의가 열리면 당상관은 당상에 앉았고 당하관은 당하에 섰다.
당상관은 정책 입안자였고 당하관은 실무자였다.
송상현 단비 가장 높아
조선시대 철저한 위계질서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적용
교수는 종6품 문관직이었다.
한양 4학(중학 동학 남학 서학)과 도호부 이상 각 읍 향교에 두었다.
경기 11인, 충청도 4인, 경상도 12인, 전라도 8인, 황해도 6인, 강원도 7인, 함경도 13인, 평안도 11인을 배정했다.
향교 생도를 가르치고 수령을 보좌하는 게 임무였다.
현감이나 찰방과 같은 품계였지만 유학을 숭상하던 조선시대 향교 책임자 교수는 품격이 달랐다.
찰방은 조선 각 도 역참을 관리하던 외직 문관이었다.
군수는 종4품이었다.
군인 계급으로 치면 동래부사는 소장, 군수는 중령이었다.
군수는 지방행정 구역인 군의 행정과 사법, 군사를 도맡았다.
임무는 수령칠사라 하여 법으로 규정하였다.
수령칠사는 지방 목민관인 모든 수령에게 적용되었다.
칠사는 농업진흥, 호구증대, 군정정비, 부역균등, 학교진흥, 송사간소, 향리 단속이었다.
임기는 군수가 1천800일이었고 동래부사가 900일, 종2품 관찰사는 360일이었다.
관직이 높을수록 지방근무 임기가 짧았다.
관직이 높을수록 상감 있는 한양에서 멀어지는 걸 꺼렸다.
동길산
'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의 비석] 가야공원 '동래 부사비' (0) | 2016.03.15 |
---|---|
[부산의 비석] 수영 '의용단'비 (0) | 2016.03.08 |
[부산의 비석]사상 '강선대' 비석 (0) | 2016.02.24 |
[부산의 비석]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0) | 2016.02.17 |
조선통신사 발길 머물렀던 곳… [일본 오이소~닛코]400년 전으로 시간여행 (0) | 2016.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