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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성지]는 병력 대거 주둔했던 '전략적 요충지'

금산금산 2017. 11. 24. 22:43

“[배산성지]는 병력 대거 주둔했던 '전략적 요충지'”



연제 집수지 발굴현장 가보니








- 부산박물관 학술자문위 점검
- 대규모 물 저장시설 2개 나란히
- 6세기 중반~7세기 축조 예상
- 누수 없도록 치밀한 설계 적용
- 희귀유물 다량 출토… 학계 관심



“집수지(集水池)가 한번 저장한 물이 누수되지 않도록 상당히 치밀한 설계로 축조됐다.

 이 정도로 큰 집수지가 두 개나 조성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주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밭대 심정보 명예교수)



   
21일 오전 부산 연제구 배산에 있는 배산성지 발굴현장에서 부산박물관 학술자문위원들이 ‘집수지 2호’를 살펴보고 있다. 김종진기자




부산박물관이 부산 연제구 배산성지 발굴조사 성과(본지 지난 21일 자 2면 보도)를 점검하고 향후 유적 조사·정비·복원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21일 오전 11시 배산성 잔뫼정 인근 발굴 현장에서 학술자문위원회를 열었다.

자문위에는 부산대 신경철(고고학과) 명예교수와 한밭대 심정보 명예교수, 부산대 서치상(건축학과) 교수,

 정의도 한국문물연구원장, 박종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 오승연 화랑문화재연구원장과 고고학 연구자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발굴 현장(1980㎡ )은 부산영재교육진흥원에서 등산로를 따라 도보로 약 15분 거리인 배산 북쪽 사면 7부 능선에 있다. 1호 집수지(직경 9.5m, 깊이 3.2m)와 영남에서 가장 큰 신라 원형 집수지인 2호(직경 13m(굴광 포함 16.5m), 깊이 4.6m)가 나란히 있고, 집수지에서 조금 떨어진 경사면에 배산성 성벽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집수지는 물을 저장한 시설이다. 발굴 현장에서 바라보면 북쪽에 온천천과 수영강, 금정산이 있고 남서쪽에 황령산, 동쪽에 장산 등이 있어 부산 일원이 한눈에 보였다. 부산박물관의 설명처럼 “전략적 요충지”였다.



1, 2호 집수지는원형으로, 3단의 계단식 호안석축(護岸石築·붕괴를 막기 위해 돌로 쌓은 구조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특히 1호 집수지 바닥에 대나무로 만든 발(길이 1.9m, 너비 0.9m)과 끝이 뾰족한 목기,

 새끼줄이 발굴 당시 모습으로 놓여 있어 전문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발과 새끼줄은 국내에서 출토된 적이 없는 희귀한 유물이다. 부산에서 최초로 먹으로 쓴 두 글자가 남겨진 길이 6㎝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도 발굴됐으나, 글자 판독을 위해 전문가에게 맡겨 현장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1호 집수지는 바닥에 방사선으로 판석을 깔았지만, 2호 집수지는 바닥을 여러 종류의 점토로 두껍게 다져 조성했다.

점토층에는 2차례에 걸쳐 낙엽을 두껍게 깔고 그 위에 돗자리를 얹어 다지는 부엽공법을 적용했다.

하층의 돗자리가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어 당시 식생 복원이나 직조기술 연구 자료로 쓰일 예정이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집수지 2호 위쪽에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둔 집수지가 더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2호 집수지 내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됐다. 나 팀장은 “기와가 집수지 북쪽에서 한꺼번에 나온 것으로 미뤄 북쪽에 집수지와 일대를 관리하는 관청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했다. 심광주 관장은 이곳에서 발견된 55㎝ 기와가 “신라가 축성한 주장성(현 남한산성)에서 발견된 673년 만든 기와와 양상이 똑같다. 크기는 더 커 국내 최대로 보인다”고 놀라워했다.

집수지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집수지에서 발견된 유물이 대부분 통일신라시대 토기와 기와이지만, 5세기 후반~ 6세기 초 삼국시대 토기와 4세기 말~ 5세기 초 한성백제 토기도 발견돼 유물만으로 축조시기를 단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신경철 명예교수는 “7세기 후반을 넘어서는 토기는 없어 보인다. (5세기 후반~ 6세기 초 조성된) 연산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유물과 비슷한 토기가 발견된 점으로 볼 때 연산동 고분군을 만든 세력이 이 지역을 매우 중요시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나 팀장은 “아직 발굴이 5%밖에 진행되지 않아 정확한 축조 시기를 밝히기 어렵다. 자문위원의 의견을 종합하니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으로 모아진다. 삼국시대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