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부두가 없었다면 한국전쟁 참패했다?

금산금산 2011. 8. 9. 08:55

[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① 프롤로그 - 부산, 한국 현대사의 전위대(前衛隊)

 

"부두가 없었다면 한국전쟁 참패했다?"

 

 

한국전쟁 때 부산항 중앙부두는 날마다 수송돼 오는 유엔군 보급물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린 소년들은 보급물품이 쌓여 있는 부두에서 담배로 인한 화재 예방 캠페인을 벌이며 생계를 유지했다. 각종 전쟁 물자를 전방으로 수송하는 기지였던 부산항은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다. 김한근 제공

유년부터 청년시절까지 부산에 살았던 '한국학 거장' 김열규 교수의 시리즈 '내 부산, 내 옛 둥지'를 시작합니다. 김 교수는 개인사와 일화를 통해 일제강점기, 광복기, 한국전쟁 때까지 부산의 근대사의 속살을 보여줄 계획입니다. 일제 식민지 수탈의 전진기지, 광복의 아이콘, 피난 수도로서 굴곡의 근대사가 녹아 있는 부산의 1930~1950년대 모습을 구수한 필치로 그려낼 것입니다. 시리즈는 매주 월요일 게재됩니다.

 

 

나는 알짜 '부산 놈'이다

'이, 부산 돌놈아!'

 

이건, 아주 어릴 적, 고성의 외가에서 외할머니께서 나더러 하신 말씀이다. 머리 쓰다듬으시면서 귀여워 못 견뎌하셨다.

 

그렇듯이 나는 알짜 '부산 놈'이다. '부산내기'다 . 젖떼기 전에 고성서 부산으로 나와서는 줄곧 자랐다.

한국전쟁 끝나고 훌쩍 서울로 옮겨가기까지 유년, 소년, 청년 시절 동안 내내, 그 인생의 황금기 내내, 부산은 나를 품어주고 가꾸어주었다.

유치원, 초등학교서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3학년까지, 부평동·부민동·부용동·보수동 등 어디에 살아도 부산은 둘도 없는 내 둥지였다.

 

 

그러는 동안, 부산의 역사는 눈부시게 달라져 갔다.

한국 현대사의 선두에 섰다. 남들보다 앞장서서 급변하는 역사를 짐 지고는 힘겹게, 다부지게 겪고 그리고 이겨나갔다.

부산은 한국 현대사의 첨병(尖兵)이었다.

 

 

일제강점기 광복동, 도쿄 번화가 '긴자' 버금

제1부두 등 6·25 당시 유엔군 '무기 수송지'

 

식민지 아픔 더욱 컸다.

나의 어린 시절과 젊음은 그러한 부산의 역사와 짝지어져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내내, 내 인생의 자취는 부산의 역사적 궤적과 함께 그려져 나갔다.

기쁨과 보람을 함께 하고 고통과 수난을 나누어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정 시대라고도 하는, 일본 식민지 시대 내내, 부산은 식민지 중의 또 식민지이다시피 했다.

식민지의 아픔을 다른 지역보다 엄청 크게 당해야 했다.

 

 

부산의 번화가며 중심지는 일본인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의 중구와 서구 요충지는 거의 다 일본인 거리고 일본인 주거지였다.

동구의 일부도 그랬었다.

 

 

그 당시 '나가테'(長手)라고 하던 광복동, 일본인들 스스로 자랑스럽게 동경의 번화가인 '긴자'에 견주곤 하던

그 광복동과 그 둘레의 중앙동, 대청동, 신창동 일대는

그야말로 '니혼진 마치'( 日本人 町), 곧 일본인 동네였다.

 

 

조선인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들의 본고장에서 밀려나 있었다.

제 집을 남에게 넘겨주고는 곁방살이 하는 꼴이었다.

그런 환경과 분위기에서 '일선공학', 곧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공부하는 학교를 다녔던

나와 같은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인 상급생들로부터 극심한 차별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 아로새겨진 항구

그러기에 부산 사람들에게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광복은 남달랐다.

조국을 되찾는 일 못지않게, 부산의 중심가를 되찾는 일은 엄청 감격스러웠다.

비로소 시민들은 부산의 주체가 됐다.

 

 

그럴 때, 제 1부두는 퍽 상징적이었다.

전쟁에 패하고는 도망쳐 가는 일본인들이 처참한 꼴로 배에 올랐고,

일본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그 부두를 통해 귀환한 동포들은, 환호하면서 내렸다.

부산은 조국 광복을 최전방에서 누린 것이다.

부산은 한국 역사 그 자체가 아로새겨진 항구요 부두였다.

 

 

이처럼 다급하게 시대적 변화를 겪은 부산은 한동안 잠잠했다.

5년 동안, 새로이 들어선 정부 밑에서 부산은 재건을 서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50년 한국전쟁을 맞아 부산은 또 다시 한국현대사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휘말려 들었다.

 

 

피난민 들끓은 '임시 수도'

전쟁에 밀려 서울서 내려온 중앙정부가 당시 경남도청에 자리 잡으면서, 부산은 '임시 수도'가 됐다.

피난민들로 들끓은 부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기지가 됐다.

그 당시 부산의 부두 네 곳은 결정적인 구실을 맡았다.

유엔군의 탱크, 대포들을 비롯한 각종 무기, 전쟁 물자를 전방으로 수송하는 기지였던

부산 부두가 없었더라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부산 부두가 없다면 우린 이 전쟁에서 못 이길 거요!"

미군의 한 장교는 마침 통역을 하고 있던 필자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검지와 중지로 V자를 그려보였다.

그 V자는 한국현대사의 크나큰 고비에서 부산이 감당해낸 구실에 바쳐진 것이었다.

 

 

◇ 약력

1932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 국문과, 동대학원서 문학·민속학 전공. 서강대·인제대 교수 역임.

현 서강대 명예교수.

저서 '한국인은 누구인가' '한국인의 에로스' 등 50여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