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② 알짜 부산 놈! 부평동에서 자라다
"사거리에 조선인 집은 달랑 넷뿐이었다"
남항매축공사가 시작됐던 1930년 용두산에서 본 부평동 시가 모습.
왼쪽 아래 웅장하게 보이는 3층 건물은 부산 최초로 건립된 서구식 건물이었던 부산상품진열관이다.
사진 위쪽 가운데 높은 굴뚝과 원통형 저장탱크가 보이는 곳은 당시 전기를 공급하던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이다. 1930~40년대 본격적으로 도시화된 부평동 사거리는 상점들이 줄지어선 상가였다.
상업도시 부산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나는 알짜 부산 놈이다.
큰 소리 쳐도 된다.
하지만 섭섭하게도 부산이 안태 고향은 아니다.
그러나 미처 기저귀도 떼기 전, 젖먹이 철에 고성서 부산으로 옮아 왔다.
그리고 대학 3학년까지 줄곧 부산서 자라고 살았다.
서울 가서 대학에 입학했지만, 불과 한 달도 못 돼 한국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돌아왔다.
젖먹이 철부터 유소년의 꼬맹이 시절, 중·고교의 소년기, 대학의 청년기까지 19년을 부산에서 보냈다.
나무로 치면 밑으로 뿌리 내리면서 위로 움이 트고 싹이 나서는 줄기에서 잔가지 나기까지, 부산서 발육한 셈이다.
부산은 내 인생의 기초 다지기를 해준 것이다.
두 번째의 안태고향인 셈이다.
식민지시대 서구, 日 상점·사무실 '즐비'
우리 땅 한복판서 일본인 우쭐대며 활보
· 나의 본적은 부평동 3가 1번지
그나마 알짜 부산 놈이라고 우쭐대는 또 다른 이유는
유소년 시절 동안, 부평동 사거리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3가 1번지'.
그것은 지금도 등등하게 나의 본적지로 올라 있다.
부평동 사거리는 1930~40년대만 해도 굉장히 넓은 십자로의 교차점이었다.
보수동 검정 다리 쪽에서 내려와서는 남포동 쪽으로 뻗어 있는 한길과
부민동의 옛날 부산지법 쪽에서 내려 와서는 대청동 쪽으로 뻗은
대로가 마주치는 그 지점을 아무도 네거리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굳이 '사거리'라고 했다.
그 무렵 본격적으로 도시화된 부평동 사거리는 장사꾼들의 상점(商店)들이 줄지어선 상가(商街)였다.
상업도시인 부산의 진면목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 집은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2층짜리의 가게였다.
그 당시로는 제법 우람한 상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갈데없는 장사꾼 아들이었다.
전형적인 부산 놈이었다.
한데 사거리는 온통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 부산으로서는 대표적인 일인(日人)상가의 하나가
다름 아닌 부평동 사거리였던 셈이다.
조선 사람의 집은 달랑 넷뿐이었다.
그 모두가 사거리의 교차점에 있던, 경찰 파출소에서 서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 우리 집은 정종 도매 가게
첫째는 생과자 가게로 순금이라는 이름의 또래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그 다음은 자전거 가게로, 호준이라는 이웃집 형이 살고 있었다.
그 옆 양복점에 살았던 옥련이라는 누나는 나와 사이가 좋았다.
바로 그 옆이 우리 집이었는데 '마사무네야 혼텐',
한자로 쓰면 '정종옥 본점(正宗屋 本店)'의 간판을 내걸고 일본 술인 정종을 도매로 팔았다.
· "누가 뭐래도 여긴 우리 땅…"
한데, 네 집의 조선인 가게 둘레가 온통 일본인 가게나 사무실로 채워져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달랑 넉 집만이 일본인 거리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음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두 가지로 풀이가 될 것 같다.
하나는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의미가 될 것 같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가 될 것 같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그 악랄한 일본인과 치사하게도 동화돼 그들 앞에 백기를 든 것이라고 풀이가 되면,
스스로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이 될 것이다.
한데 이와는 정반대로 풀이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누가 뭐래도 여긴 우리 조선 땅이야! 우리 부산의 한복판이야.
한데 너희네 일본인들만이 판치고 우쭐대는 꼴은 차마 볼 수 없어.
그건 용서 못해.'
이렇게 팔 걷고 나선 것이라고 풀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겨레의 자존심을 드높이고자 눈에 보이지 않는 의거(義擧)의 깃발을 나부낀 것이라고,
가슴을 활짝 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두 가지 풀이 가운데서 어느 쪽으로 자처해야하는 걸까?
남들에게 뻔뻔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백기를 든 것은 아니라고 자처하고 싶다.
그 당시 마음속으로 올린 의거의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를 오늘날, 부평동 사거리에서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알짜, 부산 놈으로 어린 철을 보낸 긍지가 거기 살아 있기를 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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