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⑨ 부산 초등학교 체육대회
"부민 이겨라 … 봉래 이겨라" 함성 메아리
1931년 부산공립보통학교(현 봉래초등학교)에서 열린 가을 운동회 장면.
한복 차림의 학부모들과 운동장 뒷편의 일제 강점기 가옥 모습이 이채롭다.
1930~40년대 부산지역에 조선인 초등학교는 여덟 곳밖에 없었다.
당시 모든 초등학교가 참여해 부산 공설 운동장(지금의 구덕운동장)에서
'부산 초등학교 운동 대회'를 열기도 했다.
각 학교 대표들이 맨손체조 모범을 보인 다음
각종 육상경기와 줄다리기 시합으로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다.
봉래초등학교 제공
필자는 어릴 적에, 오늘날 부산 서구의 부용동에 자리한 부민초등학교를 다녔다.
부평동 집에서는 상당한 거리였다.
온 보수동을 거친 다음, 부용동의 보수천 다리를 건너 전찻길로 나서서 학교까지,
꼬맹이 걸음으로는 왕복 한 시간은 넘게 걸릴 거리였다.
1학년, 한 해 동안 우리 집 가게 일을 맡고 있던 청년이 자전거에 태워 통학시켜 줘서 편했다.
하지만 2학년 되고부터는 혼자서 걸어 다녀야 했다. 여간 고되고 힘든 통학이 아니었다.
8개 초등학교 모여 매년 공설 운동장서 경합
맨손체조 시범 후 육상 · 줄다리기 시합 펼쳐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인,
1930~40년대에는 부산 전체를 통틀어 조선인 학생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로는,
서구의 부민, 남부민, 대신 등 세 학교 이외에
다른 지역의 영도, 봉래, 초량, 수정, 부산진 등의 초등학교까지 합쳐서
모두 여덟 학교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가 적다 보니, '부산 초등학교 운동 대회'가 일 년에 한 번씩,
가을마다 대신동의 '부산 공설 운동장'에서 열리곤 했다.
지금의 '구덕 운동장'인데 그 당시론 축구장, 육상경기장, 야구장에다 동물원까지 갖춘,어마어마한 시설이었다.
오늘날, 온 부산의 초등학교가 한데 모여서 운동회를 벌이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 당시 인구라야 20만~30만 명 정도의 소규모 도시라서 전체 초등학교를 통틀어 운동회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거창하고 화려하게 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각 학교의 대표들이 맨손체조의 모범을 보인 다음에 각종 육상경기로 승부를 겨루었다.
그런 끝에 마무리로 줄다리기 시합을 했다.
무려 반세기를 넘고도 10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그때 장면이 눈에 선하다.
선수들끼리,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지켜보면서 우리 꼬맹이들은 관람석에서 함성을 질러댔다.
다투어서 소리쳤다.
'부민 이겨라!'
'봉래 이겨라!'
서로 승리를 다짐하는 아우성은 푸른 하늘에 메아리치고 그것은 그것대로 또 경쟁을 벌이곤 했다.
1895년 부산의 조선인 학교로는 맨 처음으로 개교한 것이 지금의 봉래초등학교다.
1908년 영도학교가, 뒤이어 1911년 부산진학교가, 그 다음으로 1921년에 부민학교가 개교한 것인데,
이처럼 역사가 오래된 학교일수록 서로 경쟁심이 불꽃을 튀겼던 것 같다.
한데 이상하게도 부민은 다른 학교 제쳐놓고 하필이면 봉래와 자주 줄다리기로 맞겨루었다.
봉래가 가장 오래된 학교라는 긍지와 그것에 지지 않으려 하는 부민의 오기가 맞붙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부민학교 꼬마들은 '부민 이겨라!' '봉래 물렀거라!'하고 기를 쓴 것 같다.
아니 악을 쓴 게 틀림없다.
상상만 해도 눈앞이 선해진다.
초등학교 꼬맹이들이 수십 명씩 줄지어 두 편으로 맞붙어서는,
굵다란 밧줄을 꼬나 잡고는 밀고 밀리고 하는 그 장관이라니!
그것에 응원하는 함성이 울려 퍼지면, 용이 두 마리 맞겨룬다 해도 그만한 장관은 연출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운동장 드넓은 공간이 따라서 용틀임을 하곤 했다.
한데 승부가 끝난 다음, 사후의 일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가 이기면, 운동장 정문에서 부민학교까지,
긴 행렬을 지어 승리를 기리는, 개선장군들의 대행진이 계속되었다.
십 리는 족히 될 전찻길 한복판을 차지하고는 '부민 이겼다!'를 절규해댔다.
그럴 때, 멀리 내다보이는 자갈치의 푸른 바다도 장단 맞추어서 파도치곤 했다.
한데, 지는 때는 야단이 났다.
기가 꺾여서는 고개 숙이고 너덜너덜 걷다 말고는 죄 없는 거리의 전신주며 가로수를 애꿎게 못살게 굴었다.
더러는 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고 하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다음에 두고 보자!'
하지만 이제 모두 지나간 이야기.
오늘날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 초등학교 운동 대회는 부산의 역사에서 푸르게, 싱그럽게 되새겨져야 옳을 것 같다.
전 부산 시내 초등학교의 운동회는 오늘날 상상도 못할 것이지만 학교마다 따로 따져도 허전하기 이를 데 없다.
쉬는 시간에도 운동장은 텅텅 비다시피 할 것 같다.
다들 교실 안에서 책상에 웅크리고는 스마트폰 따위로 전자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그 웅크림이 마냥 궁색해 보이는 것이,묵은 기성세대의 헛된 기우나 노파심 탓으로 돌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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