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⑪ '후잔닛보(釜山日報)'에 글이 실리고
"초등 작문 경시 당선, 문학도 꿈 키워줘"
부산일보는 1940년대 시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작문 경시 행사를 열었다.
김열규 교수는 '부산 바다'라는 작품을 출품해 수상했다.
부산일보에 글과 이름이 실렸다.
작문 경시 수상은 그가 인문학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사진은 1946년 창간부터 1963년까지 사용된 부산일보 중앙동 사옥의 모습.
필자가 어릴 적부터 부산일보는 있었다.
일제강점기 '후잔닛보'라고 발음하던 '釜山日報(부산일보)'는 부산으로서는 유일한 언론기관이었다.
일본인 아쿠타가와 씨가 이미 1907년에 창립한 것이라니 놀랍다.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던 1910년보다 3년을 앞서 있으니, 굉장한 일이다.
모르긴 해도 초량 등 지역에 상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위한 소규모 팸플릿 모양의 간행물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다가 1919년 정식으로 주식회사로 새로이 발족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을 한성(漢城) 또는 경성(京城)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던, 서울의 같은 무렵 신문들과 비교해 보면 어떻게 될까?
총독부 기관지이던 '경성일보'가 1906년 창간되었고
그것이 민간인의 손으로 넘어가서 간행되면서 '경성신문'이 된 것은 1907년의 일이었다.
한편 한국인 유지들에 의해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다 같이 1920년에 창간되었다.
자갈치 풍광 담은 '부산 바다' 글 응모
신문 실린 내 작품 보려 중앙동 달려가
그러고 보면, '후잔닛보'의 역사는
전국적인 규모에서도 가히, 이 땅 언론계의 초창기를 빛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민간인에 의해서 간행된 신문으로만 치면,
'경성신문'과 나란히 1907년 이 땅 언론의 첫새벽에 창간의 종을 낭랑하게 울린 게 된 것이다.
해방 이듬해, 그러니까, 1946년 '부산일보'가 다시금 새로 창간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 '후잔닛보'까지 거스르게 되면, 그 역사는 장장 100년을 넘는 셈이 된다.
그런 와중에 6·25 전쟁이 일어나서 중앙정부가 부산으로 피난 온 그 당시,
부산일보는 중앙지들이 주춤하고 있던 사이에,
전국적 규모에 걸쳐서 이 땅의 대표적인 언론으로 맹활약을 펼쳤다는 것은 특별히 강조되어도 좋을 것이다.
이같이 오래고 푸른 역사를 등지고 있는 부산일보는
지금의 동구 수정동으로 사옥을 옮기기 전까지,
옛날 부산역의 광장 건너서 그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날 같으면 '연안 여객선 터미널'에서 한 블록 시내로 들어선 중앙동 1가에 해당할 지점일 것 같다.
뒤편 멀지 않은 곳에는 40계단이 있었다.
지난 시절, 제1부두로 일컬어지던 '연안 여객선 터미널'에서 시내를 향해서 뻗은 큰길이
오늘날의 '광복 지하도 상가' 위를 지나 중앙로와 마주치게 되어 있는,
그 한길 가의 중앙동 1가에 2층짜리 큰 건물의 부산일보사가 있었다.
뒤로는 부산의 대표적인 번화가였던 중앙동과 동광동이 줄지어 있어, 여간 부산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 부산일보사에서 1940년대 시내의 초등학교 학생 상대로 '작문 경시'라고 할 만한 행사를 하게 되었다.
주제는 응모자가 각자 알아서 잡게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상급반, 5학년 때쯤으로 기억되고 있는 그 당시,
필자는 담임선생의 지시로 작문 경시에 응모했다.
나는 '부산 바다'라는 제목으로 기를 쓰고 응모했다.
부평동 집에서 멀지가 않아서 자주 들리곤 하던 자갈치 바닷가의 풍광과
거기서 펼치곤 하던 장난질을 글로 옮긴 게 용케도 당선되었다.
학교로 통보가 왔다.
어느 특정한 날의 신문에 실릴 것이라고 했다.
그 당시 우리 집에서는 신문을 안 받아보고 있었기에
반 마장은 더 될 길을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신문사로 달려갔다.
정문 앞의 게시판에 내걸린 신문의 특정 칸에 당당히 실려 있던 나의 글!
글 제목과 나란히 빛나고 있던 나의 이름 석자! (일제강점기, 일본식으로 바뀐 나의 이름도 석 자였다)
그것은 내가 명색이 인문계 공부를 해서는 글쟁이가 될,
결정적인 단서로서 반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나의 온 인생의 궤적에서 가장 찬연하게 빛나는 대목으로서 지금껏 뇌리에 새겨져 있다.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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