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옛 <동래별장> 주인[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2)

금산금산 2012. 10. 20. 10:30

옛 동래별장 주인[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2)

 

 

일제강점기에 부산의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는 신화(?)였다.

'하자마 1인의 부(富)는 부산의 일본인 8천호에 해당하고 부산의 전 조선인 1만31호를 당하고도 남는다'고 했다.

경남에서만 800만 평, 심지어 전남·북의 땅까지 소유했다.

김해와 창원의 3개면에 걸친 소작농 2천여 호의 '하자마 농장'은 꽤 유명한 곳이었다.

부산·경남에서 그의 땅을 부쳐 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부산에는 조선 전체에서 쳐주는 3대 거부가 있었는데

정미업계의 왕 오이케(大池忠助), 조선의 수산왕 카시이(香椎源太郞), 그리고 땅부자 하자마가 그들이다.

3인은 부산을 대표하는 실력·재력가였으나 제1의 부자는 줄곧 하자마였고, 그는 조선 전체에서도 최고 부자였다.

이들의 행적은 기가 찰 정도이다.

이를테면 오이케가 1928년 고관공원(동구 수정동)에, 카시이가 1935년 카시이공원(부산세관 인근)에

자신의 동상을 세운 것은 안하무인 격의 공명심이 식민지 조선의 하늘을 찌른 예다.

카시이는 200쪽의 동상 건립 보고서까지 남겼다.

웬일인지 하자마는 동상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완강한 성격에 세평을 두려워 않는 고집쟁이, 천하의 구두쇠가 하자마였다.

 

 

 

 

하자마, 부산과 조선의 거부 중 1인자

뒤틀린 식민 신화의 정점에 그가 있다

 

 

 

 

하자마는 개항 직후인 1880년, 20세 때 무역상회인 오백정상점의 지배인으로 부산에 왔다.

그는 수완을 부려 식민지 조선의 남쪽 땅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1898년 몰래 사들인 영도 땅으로 러시아의 영도 진출을 막았고,

그 공으로 식민정부의 특혜 아래 조선정부에서 영도 땅을 대부받고,

1910년대 부산진과 마산포의 막대한 매립지까지 얻었다.

3차례 10여 년에 걸쳐 부산상업회의소 회두(회장), 4차례에 걸친 부산부회·경남도회 의원으로

그는 정재계에서 실력을 마구 휘둘렀다.

1930년대에는 그의 아들 셋까지 행세했으니 그것은 곧 하자마 족벌 체제였다.

 

 

 

왜 우리는 그를 알아야 하는가.

어떻게 일본이 조선을 유린했는지, 그 낱낱의 과정을 담은 '뒤틀린 식민 신화'의 정점에 그가 있기 때문이다.

동래 온천장에 동래별장이 있다.

해방 직후 미군의 경남 제3지구 군정청이 들어섰고,

한국전쟁 때는 부통령 관저였다가,

한때 요정으로 부산의 유명한 구락부였으며

지금은 한정식집으로 상전벽해 같은 곡절을 오롯이 품고 있다.

 

 

 

 

 

1929년 이 별장을 지은 이가 하자마였다.

당시는 하자마별장, 하자마탕원(迫間湯源)으로 불렸다.

일본 왕족이 부산에 오면 이곳에 머물렀다.

헛헛한 8할의 바람(風)이 누굴 키웠듯이 역사는 치욕이 8할 이상이다.

우리의 근현대는 특히 더 그렇다.

남아 있는 동래별장에서 이제 닳아가는, 얼룩진 아픈 역사의 거울을 깊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