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우에노(上野)의 <안락정>[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3)

금산금산 2012. 10. 27. 14:16

우에노(上野)의 <안락정>[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3)

 

사람에게는 배설의 본능이 있고, 그 배설에는 사회사가 얽혀든다.

개항과 더불어 조선에 없던 유곽이 처음 들어온 곳이 부산이었다.

예창기(藝娼妓)는 일본인이었다.

 

부산은 강제 개항의 최전선에서 어차피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할 운명의 땅이었다.

이미 1880년대에 100여 명의 예창기가 부산에 들어와 있었지만

최초의 공창(公娼)은 1902년 부평동(족발골목)에 들어선 우에노(上野)의 안락정으로 친다.

우에노는 부산진, 초량 등의 철도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을 상대로 행상을 하던 인물이었다.

그의 안락정은 매춘을 겸하는 특별요리점이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전관거류지의 외곽에 개발 중이던 서부 시가에서 최초의 3층 건물이 우뚝하다.

고층(?)의 안락정은 서부의 발전을 촉진시켰는데 아닌게 아니라

부산 경기는 유곽 경기에 의해 좌우된다고도 했다.

유곽은 일본 도시문화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이 식민지 개항장 부산에 곧바로 들어온 것이다.

 

 

 

                    1881년 경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포산(부산)항 견취도(대전 아드리아 호텔소장).

                               예전의 자갈치해변인 지금의 남포동2~5가를 중심으로 요리집 6개소와

                                      기루(妓樓)라는 기생집 9개소가 빨강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1902년 부산에 들어온 조선 최초 공창

이후 미도리마치 등 4곳에 공식 집창촌

 

 

안락정은 히로시마에서 온 11명의 창기로 시작했다.

어찌나 영업이 잘됐던지 창기들은 시간이 없어 주먹밥으로 식사를 대신할 정도였다.

부평동은 '좌수토원(佐須土原) 유곽 특별구역'으로 불렸는데,

1902년 이곳의 유곽은 7곳으로 금방 늘었고 1905년에는 17곳이나 됐으며 창기가 230여 명을 헤아렸다.

아주 희한하게도 당시 신문은 매일 혹은 정기적으로 유곽 및 화류계의 소식을 게재할 정도였다.

매춘이 행해진 곳은 부평동뿐만 아니었다.

당시 부산의 중심지인 일본인거류지(광복동 일대), 철도 종사자들이 많은 초량,

어업 관계자들이 많은 영도(대평동, 대교동)에서도 유곽은 성업했다.

 

 

                                   남항매축공사가 시작됐던 1930년 용두산에서 본 부평동 시가 모습.

 

 

일본인거류지의 팽창으로 유곽 특별구역인 부평동이 시가지로 편입되자 새삼스럽게 풍속의 문제가 제기됐다.

그래서 1912년 아미산 아래쪽에 새로 조성한 곳이 유명한 '미도리마치(綠町)', 오늘날 완월동이다.

이곳 1정목(町目)에는 부평동의 유곽, 2정목에는 거류지 안의 유곽이 옮겨왔다.

각 19곳, 15곳으로 모두 34곳을 헤아렸다.

이를 조선 최초의 공식적인 집창촌의 탄생으로 말하기도 한다.

 

1916년 부산에는 미도리마치, 초량, 영도 2곳 등 모두 4곳의 공식적인 유곽이 있었으며

당시 창기는 총 600여 명에 이르렀다.

물론 비공식적으로는 곳곳에서 매춘이 성행했으며, 조선인 창기도 생겼다.

 

 

공창제는 성병검사를 통해 유곽을 통제하고, 또한 재정확대를 꾀하는 묘수였다.

1910년대 공창에서 나오는 매춘관련 세금이 부산거류민단세의 10~15%나 차지했다.

어쨌든 부산을 통해 조선에 이식된 일본 문화는 다종다양했는데 그중 유곽은 '형이하학(?)의 이식'이었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