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에필로그-내게 끼쳐진 부산이여!

금산금산 2012. 2. 11. 10:15

[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26

                                                                           에필로그 - 내게 끼쳐진 부산이여!

 

"한국 근현대사 발전 텃밭…제2고향 긍지"

 

          필자(김열규 교수)는 1930년대 초부터 1950년대 초까지 20년 넘게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이었던 부산에 살았다.

                                일제강점기, 광복, 6·25전쟁까지 격동기의 세월을 부산에서 보낸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학자가 되는데 큰 자양분이 됐다.

                                                      제2의 모태가 되어준 부산에 사랑을 바친다.

                  사진은 필자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대청동 복병산 자락에 세워졌던 1930년대 일본인 사찰 금강사의 모습.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부산은 한국의 중세사와 근대사 그리고 현대사의 현장이다.

한국의 그 오랜, 지나간 시절의 역사와 현대의 역사가 어떠했던가를 어느 다른 고장보다도 생생하게, 진하게 말해 주는

고장이 다름 아닌, 부산이다.

먼 옛적의 부산부곡(富山部曲)과 부산포(富山浦)부터 가까운 옛적의 부산부(釜山府)와 근래의 부산시를 거쳐

오늘의 부산 광역시다!

 

 

누구나 알다시피 부산은 지금은 고관이라고 하는 '두모포'로 대표될, 부산포 이래로 우리 역사의 최전방이었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 많은 역사적 굴곡 점철

격동 세월 속 부산 역사 산증인 자부심 느껴

 

 

 

멀리 임진란까지 구태여 얘기를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왜구들의 노략질을 맞아서 승리의 함성을 울린 최전방이었고, 전초기지였던 것까지 새삼 들먹일 것도 없다.

중세 이래로 줄곧 한국 역사의 전초(前哨) 기지였다. 전위(前衛)였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는 불행하게도 식민지의 또 식민지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그 묵은 시대의 부산의 '다운타운'은 예외 없이, 일본인 거리였다.

거리 이름도 동네 이름도 온통 일본식으로 붙여져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고 미처 5년이 채워지기도 전,

1950년 6·25전쟁을 맞닥뜨린 부산은 임시 수도(首都)의 구실을 맡아서

마침내 전쟁에 이기는 후방 기지(基地) 노릇을 맡아내었다.

이렇듯이 부산은 한국 근현대사의 텃밭 구실을 담당했다.

그것은 부산시민의 긍지다.

자부심이다! 

 

 

나는 그 같은 부산의 근대사와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났다.

젖먹이 시절과 소년기, 그리고 청년 시절을 맞고 치르고 했다.

그것은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를 거쳐 1950년대 초반에 이르는 동안 2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있다.

부산의 근현대사의 산증인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그 사이, 유치원과 초등학교와 중·고교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 시절 동안의 3년을 겪어내었다.

서울서 갓 입학식을 치르고는 이내 전쟁에 밀려서 대학이 부산으로 피난을 왔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귀하고도 보람찬 시간은 나무로 치면,

이른 봄날 싹이 터서 신록이 우거지고 드디어 꽃이 만발할 때까지에 걸린 시간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꼬맹이 철의 나는 영락없는 '부산내기'였다.

갈데없는 '부산 똘똘이'였다.

1930년대 부산의 시가지 중에서도 가장 번화한 동네이던, 부평동 사거리는 어린 우리들의 바깥 뜰이나 다를 게 없었다.

바로 집 앞의 한길을 달리고 있는 전차와 경주를 벌이곤 했다.

1가에서 4가까지, 부평동의 일본인 동네를 휘저어대는 것이 즐거웠다.

그 당시, '사거리 시장'이라고들 하던 부평동 시장에 밤이 오면,

철시(撤市)한 텅텅 빈 공간에서 술래잡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부산 깍쟁이'는 자랐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잠자리 채 둘러메고 보수산이나 복병산에 올라서는 매미 잡기에 열중했다.

그 무렵, 복병산(伏兵山)에는 기상청이 갓 들어서긴 했어도 영주동으로 가는 고개는 막혀 있었다.

뒷날에, 문화재가 될, 저수지가 들어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산의 오르막에 있던 제법 큰 규모의 일본인 사찰(寺刹) 둘레의 숲이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6년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대학에 입학해서는 한때나마 부산을 떠나 살게 되었는데,

웬걸!   6·25전쟁이 발길을 되돌리게 했다.

거의 3년을 부산서 대학을 다녔다.

'임시 수도', '피난 수도'로 전란(戰亂)에 휩쓸려서 경황 없이 법석대던 부산서

뒷날 명색이나마 학자가 될 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

그 뒤의 나의 인생길은 그 연장선에 불과하다.

 

 

그래서 근·현대의 부산은 나의 제2의 모태가 되어 주었다.

유소년기와 청년 시절이 안기고 품기고 해서, 제2의 안태고향이 되어 준 부산,

그 부산을 위해 효도를 다하듯 사랑을 바칠 것을 다짐하면서...   26회 연재의 마무리를 짓고 싶다.

 

 

                                                                  -끝-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