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22 '대정공원' 3·1절 기념식에서 우익의 테러 당하다
"독립선언문 낭독할 때 난데없이 돌 벼락"
대정공원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일본의 대정(大正) 천왕 즉위 기념사업 일환의 결과물이었다.
지금의 부산 서구청 자리에 운동장을 겸한 공원시설로 1918년 조성됐다.
이후 1927년 대신동에 구덕운동장이 조성되면서 대정공원은 조경 공원이 됐다.
해방 직후 대정공원에서 좌익 학생들이 주관한 '삼일절 기념식'이 열렸는데,
우익 학생들의 테러가 일어났다.
대정공원 역시 치열해진 좌우익의 갈등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였다.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대정공원(大正公園)'
그런 이름의 공원이 부산에 있었다면 누가 믿을까?
대부분 부산 시민의 기억에서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대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정공원은 엄연히 있었다.
부산 시내에 당당히 시퍼렇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나마 부산 시내의 유일무이한,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공원이었다.
오늘날, 용두산, 금강, 중앙, 시민, 민주, 암남 등등으로 자그마치 열 곳이 넘을 공원이 부산에 있지만,
일본 강점기에는 오직 '대정공원' 하나밖에 없었다.
거짓말 같아서 잘 믿기지 않을 것이다.
부산 유일 공원서 열린 좌파 학생회 주관 행사
각목 든 우익단체 덮쳐… 이념 갈등 현장 목격
'대정공원'의 '대정(大正)'은 일본인들로서는 고개 숙여서 모셔 받들어야 할 말이다.
일본말로 '다이쇼'라고 읽히는 '大正'은 지난 시절, 일본 왕의 칭호다.
그는 오늘날 왕의 할아버지에 해당할 사람이다.
그렇게 왕의 칭호가 붙여진 '대정공원'은 일제강점기 성역에 준하는, 시민을 위한 공원이었다.
보수천이 자갈치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하구(河口) 언저리에 있었다.
일본 강점기 '미도리 마치'
그러니까 오늘날 충무로 2가(한때 완월동이라고 일컬어진) 쪽에서 뻗어 내린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충무로 로터리 가까운 곳인데, 그 자리에는 부산 서구청이 들어 서 있다.
오늘날 부산 중구와 서구 전체에 걸친 넓은 지역에,
그것도 당시 인구가 비교적 조밀했던 지역에 공원이라곤 달랑하니 하나밖에 없던 터라,
근처 주민의 사랑을 받았었다.
부평동에 살고 있던 일본 강점기
어린 시절의 필자는 보수천을 따라 한참을 가긴 해도, 비교적 자주 놀러 가곤 해서, 다사로운 정이 어린 곳이다.
시내 한복판에 덩그렇게 우거져 있는 숲 동산이라서 마음이 끌린 것 같다.
집에서 나오는 길로 잠자리채를 들고 냇가를 뛰어가던 것이 바로 어제 같다.
지금의 암남공원이 있는 '송도 해수욕장'에 갈 때면 으레 지나치던 곳이기도 했다.
그런 정겨운 곳에서 뒷날 대낮에 날벼락을 맞다니? 그것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그러니까 1947년 필자가 중학교 3학년 때 일이었다.
바로 대정공원에서 '삼일절 기념식'이 크게 열렸다.
부산 시민과 여러 중학교에서 대거 참석했다.
식은 우렁차게 진행되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아 조선민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독립선언문이 낭랑하게 메아리쳤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난데없이 돌이 우박 쏟아지듯이 날아들었다.
돌 벼락이 떨어졌다.
함성이 터지면서 한 무리의 괴한들이 몽둥이를 들고는 달려들었다.
'테러다! 우익의 테러다!'
누군가 소리쳤다.
우리 어린 학생들은 기겁하고는 도망질쳤다.
물살처럼 공원 바깥으로 뛰었다.
나도 거기 휩쓸려서 냅다 달렸다.
돌멩이는 계속 날아들었다.
'저 빨갱이 놈들 잡아라!'
고함이 무서웠다.
죽자고 뛰는데 그만 앞에서 친구 둘이 넘어졌다.
그들과 부딪치면서 뒤따르던 무리가 길바닥에 쓰러졌다.
나도 나뒹굴었다.
하지만 용케 얼김에 일어서서 앞을 보고 도망질쳤다.
돌 벼락을 헤집고 무사히 탈출에 성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사건이 다름 아닌 좌익계열, 그러니까, 남로당(남조선 노동당) 따위의 공산주의자들이 주관한 모임에
한민당이나 이북에서 월남한 청년단 등의 우익 계열에서 테러를 가한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우리 중학생은 좌익이고 우익이고 알 바 아니었다.
다만, 상급반 학생으로 학생회를 주관한 패거리가 좌파들이었다.
하급생인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그들이 주관한 모임에 참가한 것뿐이었다.
그날 돌 벼락 속을 내달리다가 쓰러져서 다친 그 아픈 경험은
그 무렵부터 한동안 계속해서 치열해진 좌우익의 갈등이라는 역사적 현실에 참여한 꼴이 되었다.
그래서 어린 우리도 역사의 증인이 된 것이다.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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