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20 '학생 치안대'로 파출소 근무
"도둑, 나오기만 해봐라 … 사명감에 불타"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크나큰 감격과 환희를 가져다주었다.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미국 군인들에 의한 '미 군정'이 시작됐지만, 치안행정의 공백이 벌어졌다.
비상수단으로 '학생 치안대'가 발족했다.
당시 중학생들은 파출소에 배정돼 임시 경찰관이 됐다.
김열규 교수도 옛날 경남도청(지금의 동아대 부민동 캠퍼스)과 나란히 있던
부산지방법원의 뜰에 딸린 부민동 파출소에서 근무했다.
사진은 1910년 설립됐던 일제강점기 부산지방법원의 모습.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1945년 8월 15일! 그날 조국의 해방과 광복을 나는 꿇어앉아서 맞이했다.
그 당시, 대연동에 있던 부산 공립 제일공업학교 기계과 2학년 학생이던 우리는
학교 안 기계 공장에서 군수품을 만들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몰릴 대로 몰리고 있던 일본은 소년들조차 전쟁을 위해 부려 먹은 것이다.
그러던 중, 8월 15일 바로 그날,
공장에서 우리를 감독하고 있던 군인이 한낮 12시에 공장 앞에 나와 모이라고 했다.
미리 준비한 라디오에서 일본 왕의 중대 방송이 있을 것이라고 하자,
우리는 곧추 꿇어앉아야 했다.
광복 후 치안 엉망…학생들 경찰관 임무
'조국 안녕 지킨다' 일념에 어깨가 '으쓱'
이내 왕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들려 왔다.
울먹이듯, 유감스럽게도 전쟁에 졌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줄지어 앉았던 일본 군인들이 통곡을 시작했다.
동급생인 일본인 학생들도 덩달아서 흐느꼈다.
그런 분위기에 밀려서 우리 조선인 학생들은 떨치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그냥 앉은 채로, 소리 없이 만세를 불러댔다.
그렇게 우리는 흙바닥에 무릎 궤고 꿇어앉은 채로 '조선 독립'을 맞이했다.
일본 군인과 동급생들의 울음에 얽혀서 광복과 해방을 무릎 꿇고 앉은 채로 맞았다.
그것은 지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한데 크나큰 감격과 환희로 맞은 광복이지만 모든 게 고루 바람직하진 못했다.
이내 지독한 좌우익의 갈등에 휩쓸렸다.
그렇게 광복한 조국, 독립한 조국은 여러 가지로 문제며 모자라는 게 많았던 것 같다.
그게 부산은 더했던 것 같다.
일본인들이 거리며 각종 공공 기관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판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곳곳에서 일시적이나마 공백 상태가 벌어지고 결함이 노출되기도 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치안은 더한층 말썽이었다.
이른바, '미군정(美軍政)', 곧 미국 군인들에 의한 행정이며 정치가 들어서긴 했지만,
치안행정에는 부족한 점이 적지 않았다.
해서 비상수단이 동원되었다.
'학생 치안대'가 발족한 것이다.
그 당시 학생이라야 중학교 4학년까지가 고작인데다 그 수도 태부족이었다.
겨우 2학년이던 나는 부민동 파출소(경찰지서)에 배정되어서 난데없이 임시 경찰관이 됐다.
옛날 경남도청(지금의 동아대학교 부민동 캠퍼스)과 나란히 있던 부산지방법원의 뜰에 붙어 있던 파출소에 근무했다.
그러니까 '꼬맹이 경관'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 봐야 모두 해서 셋이 전부였는데,
4학년 상급생 하나가 파출소장(지서장)으로서 어깨 힘주고는 으쓱거렸다.
우리는 '치안대(治安隊)'라고 적힌 완장을 팔에 두르고는 학생 복장 그대로 파출소 앞에서 보초를 서기도 했다.
부평동으로 통한 거리와 아미동으로 통한 거리가 마주치는, 네거리를 내다보면서 사명감에 가슴 펴기도 했다.
그런 꼴, 그런 맵시로 도둑을 잡는 포도대장 구실 그 자체는 몰라도 하다못해 그 흉내라도 내어야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우스꽝스럽게만 여겨진다. 만화와도 같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진지하고 또 심각했다.
우리가 사는 동네의 치안을 우리가 지킨다는 생각이 여간 진지한 게 아니었다.
갓 해방된, 조국의 안녕을 지킨다는 일념에 어깨에 힘이 들기도 했다.
'도둑, 나오기만 해봐라!'
꼬마 경찰관은 잔뜩 사기가 올라 있었다.
그나마 낮에만 근무하고 밤엔 자리를 지키지 않았는데, 자면서도 도둑 잡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러니 주어진 임무를 밤낮 가리지 않고서 수행한 셈이다.
그날의 그 꼬맹이 치안대!
정부에서 최상급의 훈장이라도 베풀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절대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 그 꼬맹이 경찰관으로서 역할과 본분을 다했노라고 장담해도 좋다.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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