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관부 연락선 오가던 제 1 부두

금산금산 2011. 9. 21. 08:29

[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18. 관부 연락선 오가던 제1 부두

 

"日서 귀향 숙부보다 선물이 더 반가워"

 

 

                                    관부연락선은 1905년 9월 11일 이끼마루호가 취항하면서 개설됐다.

                                    당시 부두는 지금의 중앙동 연안여객터미널이 자리한 곳에

                          잔교(棧橋·부두에서 선박에 닿을 수 있도록 해 놓은 다리 모양의 구조물)를 이용했다.

                         1912년 6월 15일 지금의 제1부두가 제1잔교부두로 완공돼 관부연락선 부두로 이용됐다.

                                   1930~40년대만 해도 제1부두는 경부선 열차의 시발점과 종착역이었다.

                                                       사진은 1930년대 관부연락선 부두 터미널의 모습.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관부 연락선'. 이젠 잊힌 말이 되고 말았다.

 

 

관부(關釜)의 부는 부산이고, 관은 일본의 '시모노세키' 곧 하관(下關)의 관이다.

대한해협 건너, 부산과 하관 사이를 정기적으로 오고 간 연락선을

일제강점기에 '관부연락선'이라고 일컬었다.

 

 

1905년 시작되어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운행되었는데,

현재의 '부관 페리'가 그 뒤를 잇고 있는 셈이다.

 

 

관부 연락선의 부두도 오늘날 부관 페리가 이용하고 있는 연안여객선 터미널인데,

그 당시는 제1 부두라고 했다.

 

 

방학 때마다 도쿄서 대학 다니던 숙부 '마중'

귤 한꾸러미, 조선서 맛볼 수 없는 귀한 과일

 

 

관부 연락선이 한창 운항하고 있던 당시의 부산은 인구가 20만 넘고 30만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중소도시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 무렵 부산은 대신동에서 범일동까지가 전부였다.

지금으로는 동(洞)에 해당할, 정(町)이라야 20개에 미치지 못했다.

 

 

그 가운데서도 영주동 동남쪽인 지금의 중구와 서구의 시가지가 더 발달하여서,

그 안의 정(동)들은 거의 모두가 일본식으로 붙여진 이름을 갖고 있었다.

 

 

중앙동이 '오쿠라마치(大倉町)', 동광동이 '혼마치(本町)', 광복동이 '벤텐마치(辨天町)' ,

창신동과 신창동 일대는 '니시마치(西町)', 남포동 거리가 '쇼와 도오리(昭和通)' 등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이들 동(정) 이름은 순전히 일본식이라서 해방 이후는 지워지고 말았다.

 

 

유감스럽지만 일정강점기 부산은 그만큼, 일본인의 도시인 비율이 높은 도시였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필자가 그 당시 부산을 식민지 안의 또 식민지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심지어 '쇼와 도오리'의 쇼와는 당시의 일본 천황의 칭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속에서 제1부두는 더욱 일본과 연관이 깊었다.

하긴 같은 무렵의 제2~3 부두도 마찬가지였다.

부산 항구도 그만큼 일본색이 짙었던 것이다.

한데 제1부두는 일본을 내왕하는 통로나 다리이다시피 했다.

오늘날의 '연안 여객선 터미널'인, 제1부두에 닻을 내리고 있던

 '콩고마루'( 金剛丸)란 이름의 7천 톤 급 연락선의 거대한 선체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30~40년대만 해도 경부선 열차는 부산역을 지나서 제 1부두를 시발점과 종착역으로 삼았었다.

손님들은 부두 안에까지 쑥 들어와 기차에서 내려서는 곧장 배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 점으로는 경부선 철도는 제 1부두의 연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내리는 손님들은 주로 일본 여객이 많았다.

그 당시 조선인 선객은 '도항(渡航) 증명서(證明書)'라는 문서를 가진 사람만 연락선에 오를 수 있었다.

그건 조선인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배 타고 건너와도 좋다는 서류였다.

 

 

나는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그런 제1부두에 일 년에 한두 번은 나가곤 했다.

숙부께서 일본의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과 겨울 방학이 오면 숙부께서는 으레 언제 부산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주셨다.

 

 

그러면 서둘러서 제1부두로 마중을 갔다.

연락선 갑판의 긴 계단을 타고 상륙하는 숙부 마중을 가는 것은 신 나는 일이었다.

그것에는 숙부의 귀향이 반갑다는 이유 말고 다른 곡절이 있었다.

 

 

숙부가 건네주시는 선물이 숙부보다는 더 반가웠다.

예를 들면, 겨울 방학에는 귤을 한 꾸러미씩 갖고 오시곤 했는데,

나는 그것을 숙부보다 더하게 환영했다.

그 당시 조선 안에서는 아직 생산되지 않았기에 귤은 여간 귀한, 맛 나는 과일이 아니었다.

 

 

집에까지 멍청하게 입 닫고 갈 수는 없었다.

귤 한 알, 껍질을 벗겨서 입에 물고 숙부 손잡고 가던 그 걸음도 귤 맛 못지않게 상쾌했다.

그게 바로 내가 누린 제1부두의 보람이었다.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