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15. 수영 군사 비행장 건설에 참여
"학교서 점심 먹은 후 활주로 공사에 동원"
수영 비행장은 1944년 7월 일본군의 비행장으로 개발됐다.
이때 중학생들이 비행장 활주로를 닦는 일에 동원됐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에 미군 K-9비행장이 들어섰으며,
전쟁 이후 1959년 9월 1일 부산수영공항으로 개장했다.
이 공항은 1963년 9월 30일 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으나,
1976년 8월 1일 지금의 김해국제공항으로 이전하면서 군 전용공항으로 이용됐다.
사진은 1960년대 중반 수영 비행장 모습.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일제 강점기 일본 공군 기지와 해방 뒤 국방부가 관장하는 군용비행장 구실을 하다가
뒤이어 부산 국제공항으로 기능이 바뀐 수영 비행장의 흔적은 이제 찾기 어렵다.
총면적 35만 5천 평의 광대한 땅덩이에는 꼬박 아파트로 채워진 이외에, 거대한 각종 공공건물이 즐비해 있다.
그중에서도 '벡스코'와 해마다 세계적인 규모로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 무대인,
'두레라움(영화의전당)'이 가장 두드러져 있다.
'벡스코'는 '부산전시컨벤션센터'로서 각종 국제회의가 자주 열리는 것 말고도
무역박람회 등을 위한 전시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부산시 명소 중의 명소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한데 필자로서는 어릴 적 추억이 어려 있는 현장으로 기억에 새겨져 있다.
오후 내내 흙먼지 뒤집어써가며 '고된 노동'
일 마치면 구운 밀가루빵 배급…굶주림 달래
아주 어릴 적 가족과 함께, 옛적의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수영역에 내리면 해수욕장으로 갈 수 있었다.
역에서 해변으로 가자면, 골프장과 포도밭을 지나야 했는데, 여간 오순도순한 길이 아니었다.
그 낭만에 어린 장소가 일본 군국주의 말기의 발악으로 말미암아 군사 비행장으로 편입된 것이다.
한데 일본군의 군사 비행장 터가 최초로 닦였던 그 당시
'부산 공립 제일 공업학교' 1학년이던 필자는
동급생 모두와 함께 이른바 '근로봉사'로 수영 비행장 건설에 참여하게 됐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부모님 따라 먼 길 와서 해수욕장에 드나들던, 바로 그 아기자기했던 터전을 허물고
전쟁을 목적으로 삼은 비행장을 만드는데, 강제로 동원되다니!
그런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당시 필자가 다닌 학교가 있던 대연동에서 우리는 점심만 먹고 나면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수영까지의 그 먼 길을, 십 리가 훨씬 넘을 그 길을 꼬박 걸어 비행장의 건설 현장까지 가야 했다.
중학교 1학년 꼬맹이들이 이미 지쳐 있는 상황에 아랑곳도 하지 않고
군대 장교 녀석들은 중노동으로 우릴 부려 먹었다.
군대는 막판 발악을 하는 무리로 전락하고 있었고
우리 꼬마 학생은 막일하는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겨우 열서넛 살짜리인 우리에게 비행장 활주로 닦는 일을 줬다.
보통 상식으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어리고 어린 것들이 군사용 비행장의 건설에 투입되다니….
게다가 비행장의 으뜸가는 시설인 활주로를 닦는데 내몰리다니,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일본 군국주의에 이미 망조가 들어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이미 광기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동래 쪽에서 수영을 지나 해운대로 통하는 큰길 너머에 있는 산 중턱에서
작은 바위 덩치를 어깨에 메고 저다 나르는 게 우리의 임무였다.
그 가엾은 일꾼들은 비행기가 날아오르기 위해서 질주하는 활주로에다 돌을 깔았다.
소년들로서는 감당키 어렵고 고되고 벅찬 노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따위로 만든 활주로를 타고 날아오른 비행기로 막다른 골목에 쫓긴 전쟁을 치르겠다니,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어 있었다.
비행장 공사에서 가장 요긴한 대목을 우리 어린 것들에게 맡긴 셈이었다.
청년들이 몽땅, 군대로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고 없는 틈을 우리가 메워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희생양이나 다를 게 없었다.
땀에 절이고 흙먼지 뒤집어써 가면서 오후 내내 노동했다.
해 질 녘에야 겨우 일에서 풀려났다.
수영에서 이십여 리는 더 될, 인적도 드문 길을 걸어 전차를 타기 위해 거제리까지 걸어가야 했다.
한데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나면 아주 특별난 일이 일어났다.
멋지게 구운, 제법 덩치가 큰 흰 밀가루 빵이 하나씩 우리에게 주어졌다.
배급으로 주어지는 식량이 모자라서 식구들이 굶주리고 있던 판에,
그것은 엄청나게 커다란 먹을거리의 선물이었다.
나는 그걸 먹지 않고 집으로 모셔 왔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동생들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과 나누어 먹던 그 빵의 향연(饗宴)은 지금도 수영을 지나칠 때마다 되새겨지곤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날라서 활주로에 깐 그 작은 바위가
벡스코며 두레라움 등 건물의 주춧돌 구실을 하고 있기를 바라곤 한다.
서강대 명예교수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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