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하단과 명지서 '수박 서리'

금산금산 2011. 9. 3. 20:45

[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14. 하단과 명지서 '수박 서리'

"주먹으로 깨 한 입 베어먹는 맛 천하제일"

 

                            낙동강 하굿둑이 만들어지기 전 명지와 하단 주민들은 나룻배를 타고 왕래했다.

                                                나룻배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물이 얕은 갈대밭 모래톱 사이를 지나갈 때 사공은 어깨에 멘 밧줄로 배를 끌고 가야 했다.

                                              손님들도 배에서 내려 사공을 돕기도 했다.

                                 사진은 1960년대 초 갈대밭이 무성한 낙동강 하구를 왕래하는 나룻배의 모습.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1940년대 초반의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하단, 명지, 신호는 부산이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김해군쯤에 속해 있었을 것 같다. 그러자니 시내에서는 멀고도 멀었다.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명호(명지의 옛 이름)는 그런 곳이었다.

 

 

초등학교 상급반 시절, 부산 서구 부민동에 살았지만, 하단은 가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명지나 신호는 더 말할 게 못 된다.

지금으로서는 부민동이 속해 있는 서구와 하단이 속해 있는 사하구가 바로 이웃이어서 서로 멀다는 느낌이 진할 것 같지는 않다.

명호가 속해 있는 강서는 사하구와 접한 이웃이어서 부민동과 하단이 그다지 멀지 않게 느껴지듯이

부민동과 명호 또한, 서로 크게 멀다는 느낌이 없을 테지만, 옛날엔 그렇지 못했다.

 

 

원두막 감시 피해 기어들어가 '작전 감행'

갈대 우거진 낙동강 하구 나룻배 '낭만적'

 

 

부민동 집을 나서서 서대신동 비탈의 마을 안,

초라한 짚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안의 긴 골목을 꼬불꼬불 헤집고 올라가면,

한참 만에 겨우 '대티 고개'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한자로 '큰 고개'란 뜻으로 '대치(大峙)'라고 쓴 그 고개서부터는 괴정 땅이었다.

 거기만 올라서면 하단이 멀리 내다보였다.

괴정까지는 꼬맹이 시절에도 자주 다닌 곳이다.

할아버지 산소로 성묘 다니느라고 설날과 추석이면 으레 지나치던 곳이다.

마침 일가처럼 가깝게 지나던 분의 집이 있어서, 그 당시 작은 농촌 마을이던,

괴정은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괴정서 하단까지는 내리막길로 단숨에 다다를 수 있었다.

길이 강과 맞닿은 곳에는 갈대밭이 무성했다.

나루터가 있었는데, 거기서 배를 타면 명지면의 신호까지 갈 수 있었다.

신호는 한 시대 전 같으면 그 지역 주민들은 '신도'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지금은 신호대교가 지나가고 있으니, 새삼 시대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될 것 같다.

그 옛날, 1940년대만 해도, 하단서 신호까지는 자그마한 나룻배로 갔다.

사공이 때로는 노를 저어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는

중간 중간에서 물이 얕은 갈대밭의 모래톱 사이를 지나갈 때가 있었다.

그러면 사공이 모래톱에 올라가서 어깨에 멘 밧줄로 배를 끌고 가기도 했다.

그가 고생스러워 보이면, 손님들이 스스로 배에서 내려 사공을 거들기도 했다.

 

 

어른들 키를 넘겨서 빽빽하게 갈대가 우거져 있는 모래톱,

그 위에서 밧줄 어깨에 메고는 '영차영차!' 소리의 장단 맞추어서 배를 끌고 가고 있는 모습은 고되어 보이는 만큼 낭만적이기도 했다.

소년 '머슴아'였던 나로서는 거기 한몫 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자못 그리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어렵사리 배가 신호 나루에 닿으면, 재미나고 신이 나지만 위험한 일이,

일종의 모험일 수도 있는 일이 우리 꼬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신호에는 그 당시, 초등학교 분교의 교장직을 맡고 있던 일가가 있어서 낯선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서의 우리의 작전은 괴정서 함께 간 친한 집의 형과 합동으로 감행하는 것이어서 성공률이 낮지는 않았다.

 

 

그 당시 신호의 섬에는 수박밭이 있었는데, 그곳을 노려 우리는 기습을 가한 것이다.

 

 

원두막 감시의 눈을 피해 밭에 바싹 배를 깔고 기어들어 갔다.

그래 봐야, 수박 한 통, 주먹으로 깨어서는 몇 입, 날름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어떻든 들키지는 말아야 했다.

 

 

도둑질 아닌, 서리로 챙겨 먹어대는 수박은 천하의 별미였다.

하지만 서리가 끝까지 무사할 수 없는 때가 있었다.

밭주인이 염탐하는 우리를 발견하고 원두막에서 내려 달려오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먹다 남은 수박 조각을 추격자를 향해서 냅다 던져댔다.

 

 

'아나 잡아 봐라!'하고 힘껏 도망질쳤다.

그래서 탈출 작전이 성공하면 입가에 묻은 수박을 혀로 핥으면서 내다보곤 하던,

그 푸른 신호의 물빛,

오늘날 신호대교에 올라서도 보일 것 같지는 않다.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