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19. 광복 맞은 제1 부두
"쫓겨가는 일본인·귀국 동포들로 북새통"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부산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전쟁에 패한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징병과 징용으로 일본과 동남아 각지로 끌려간 귀환동포들도 부산항에 도착했다.
당시 중학생들은 귀환동포에게 주먹밥을 전달하거나,
그들을 부축해 배에서 내려오는 일을 맡았다.
사진은 해방을 맞아 귀환한 동포들이 부산세관 앞 도로를 지나고 있는 모습.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1945년, 광복을 맞은 부산은 엄청 부산했다.
다른 도시와는 눈에 띌 정도로 다르게 부산했다.
별나게 일본색이 강했던 도시라서 반사적으로 그랬던 것 같다.
그런 부산의 정황을 제1부두가 대변하다시피 했다.
시내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제1부두야말로 제일 번잡하였다.
참혹하게 전쟁에 지고 쫓겨 가는 일본인들로 벅적댔다.
부산 시내에 거주하던 일본인만은 아니었다.
내륙 지방에서 경부선 기차를 타고 와서 배에 오르는 일본인들이 줄을 이었다.
그것은 영락없는 패잔병의 꼬락서니였다.
초라한 옷차림에 짐들을 지고 들고는 비실대는 몰골이 스산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 으리으리하던 일본 군국주의의 모습이 연상되어서 여간 처연한 게 아니었다.
여름방학 때 귀환 징병·징용인들 마중 나가
병들고 지친 동포 부축 갑자기 눈물 쏟아져
그런 몰골의 일본인과 지척으로 우리 동포들의 귀국 행렬이 배에서 부두로 내려섰다.
징병(徵兵)으로 또는 징용(徵用)으로 일본과 동남아의 각지로 끌려간 동포들이 돌아왔다.
그뿐만 아니다.
그들 사이에는 일본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던 동포들도 껴 있었다.
모두 '귀환동포(歸還同胞)'라고 했다.
외지에서 모국으로 돌아온 동포라는 뜻이다.
별로 넓지도 않은 한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대조적인 무리를 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패전(敗戰)해서 쫓겨 가는 무리가,
다른 한편으로는 모국의 광복을 맞이해서 돌아오는 무리가 득실대고 있었다.
그러나 몰골이 초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겨우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귀환동포 마중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마침, 8·15 광복을 맞이한 직후의 여름방학 중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8·15 광복 직전까지 관부연락선이 오가던 제1부두는 그 좌우로 배가 닻을 내리게 되어 있었다.
부두에 세워진 건물은 2층이었는데,
왼편에서 배를 내린 선객들은 2층으로 와서는 계단을 타고는 아래로 내리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계단 위에서 귀환동포들을 마중하게 되어 있었다.
굶주리고 지친 그들을 부축해서는 계단을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둔 주먹밥을 하나씩 그들에게 쥐여주는 일도 해야 했다.
영주동 봉래 초등학교에서 미리 밥을 지어서 마련해둔 주먹밥을
커다란 통에 담아서 트럭에 싣고 우리가 날라 온 것이었다.
우리 중학생들은 그런 일에 그야말로 마음과 몸을 바쳤다.
처연한 모습으로 모국에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베푸는 일이
우리로서는 여간 보람찬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말이 아니게 병들고 아주 지쳐서는 스스로 몸을 가누기조차 못하는 청년 한 사람을 내가 맡게 되었다.
그는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허리조차 바로 세우지 못하는 그의 겨드랑 아래로 내 어깨를 들이밀었다.
힘에 부쳤지만, 악을 쓰고 그를 부축했다.
내 목에 감긴 그의 팔에는 기운이 없었다. 계단을 겨우겨우 한 발짝씩 비틀고는 내려왔다.
몇 번 쓰러질 뻔도 했다.
그렇게 높지 않은 계단을 내려오는 게, 무슨 태산을 타고 내리는 것 같았다.
한여름이라 나는 윗도리로는 얇은 속셔츠를 걸친 것뿐이었다.
어깨 아래로 드러난 나의 맨살과 찢어져 나풀대는 옷으로는 가리지 못하는 그의 가슴팍의 맨살이 맞닿았다.
그의 온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내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용을 써서 간신히 계단 아래로 내리 설 수 있었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학생에게 그를 넘겨줄 차례가 되었다.
내 어깻죽지에 축 처져서 걸쳐 있는 그를 떼놓아야 했다.
하지만 그게 녹록지 않았다.
그의 가슴팍의 종기에서 터져 나온 피고름이, 그 새에 내 어깨 살에 진하게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걸 억지로 떨어지게 해서 그를 떼어 놓는 순간, 그가 땅바닥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머리를 땅바닥에 박고는 웅크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쳤다.
그의 등을 다독거리는 내 손등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귀환동포를 맞이했던 당시 나의 몰골이었다.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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