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중앙동 40계단과 '학생 연맹'

금산금산 2011. 11. 2. 12:11

[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21. 중앙동 40계단과 '학생 연맹'

"우익 단체 학생들에 붙잡혀 구타 당해"

 

 

 

 

 

 

 

 

 

                            1953년 11월 발생한 '역전대화재' 이전 부산역에서 40계단으로 비스듬하게 연결된 도로는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화했다.

                                        역전대화재 이후 1950년대 후반 이 도로는 지금의 형태로 바뀌었고,

                                             40계단도 원래 자리에서 남쪽으로 30m 옮겨져 조성됐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 40계단은 우익 학생 단체가 자리잡고 있어

                                                        중·고교 학생들에게 위험한 곳이었다.

                                                         사진은 화재전 1952년 40계단 모습.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한 시대 전, 아니 두어 시대 전에도, 40계단은 부산 명물의 하나였다.

오늘날 같지는 못해도 명물로 제법 융숭하게 대접받았던 곳이다.

 

 

 

옛날 '부산본역'(오늘날의 중앙동 무역회관 자리)을 나와 전찻길을 가로질러서,

옛날 부산일보사 곁의 사거리를 지나면 중앙동 큰 거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

거기서 몇 걸음 안 가서, 높다란 언덕을 만나는데, 거기 돌계단이 버티고 있었다.

일러서 '40계단'이라고 했다.

 

 

 

그 위로는 동광동과 대청동에서 영주동으로 가는 좁다란 길이 뻗어 있었는데,

1940년대 초만 해도 시내 같지 않게 한가한 고갯길이었다.

 

 

 

 

계단 중턱 '학생 연맹' 위치…늘 피해 다녀

무고한 사람 좌익 몰아붙여 폭행하기 일쑤

 

 

 

 

 

한데 오늘날은 대단히 번화한 도심의 거리로 변모하고 있다.

'40계단 문화관광 테마 거리'라고 이름 붙여진 그 일대,

곧 국민은행 중앙동 지점에서 40계단 위를 거쳐 '40계단 문화관'까지, 그 일대는 여간 번성한 게 아니다.

 

 

 

그런데, 이 일대는 번화한 한편으로,

6·25 전쟁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처연한 자취를 간직해, 역사박물관의 거리라고 할 만한 곳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왕창왕창 지나다니는 길과 층계는 6·25 전쟁 당시 시대상이며 사회상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당시 서민, 그것도 피난민의 삶의 모습을 현실감 넘치게 재현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40계단 둘레는 그 무렵, '경상도 아가씨'(박재홍 노래)라는 가요가 일러주고 있듯이,

피난민들로 넘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인구수가 무려 10만을 넘었다고 전해진다.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런 동정하는 판잣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이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고향 언제 가려나'

 

 

 

 

 

그와 같은 피난살이의 처절한 모습이

갖가지 조형물로 40계단과 그 둘레에 전시되어 있다.

 

 

 

물동이 두 개를 좌우로 어깨에 메고 가는 어미 곁에 물동이를 인 딸아이가 따라가고 있는 모습.

 

 

 

던져진 지게에 어깨 기대고 길게 땅바닥에 누운 노동자 곁에, 짐짝을 깔고 앉아 축 처져 있는 인부의 몰골.

 

 

 

귀를 막고 선 두 아이를 저만치에 두고 일손을 놓지 않고 있는, 뻥튀기 아저씨의 모습.

 

 

 

이들 조각은 바로 살아 있는 역사의 재현이다.

6·25 전쟁 당시, 이북 땅 고향을 버리고 피난 온 서민들의 참혹한 생활상이 여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같이 40계단과 그 둘레는 겨레의 아픔이 서리고 그 상흔이 끼쳐 있는 곳이기도 한데,

나로서도 학생 시절의 아리고 또 아린 사연이 맺혀 있기도 한 곳이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2~3년 전까지만 해도 40계단은 중·고교 학생들에게는 위험지구였다.

계단 중턱에 우익 학생 단체인 '학생 연맹'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그 당시까지 정치 집단은 좌익과 우익으로,

곧 공산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으로 맞서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그 파장이 학생들에게도 미쳤다.

좌익과 우익 학생 단체는 '학생 동맹'과 '학생 연맹'으로 대립해 투쟁을 계속했다.

 

 

 

그런 중에 부산의 '학생 연맹'은 하필 40계단 중턱에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는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붙잡아다가 괴롭히곤 했다.

그런 소문이 자자했던 중이라 나는 되도록 40계단은 피해 다녔다.

 

 

 

한데 어느 날, 무심코 40계단을 오르다가 그들에게 걸려들었다.

안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무고한 사람을 좌익으로 몰아붙였다.

구타를 당하고 발길로 차이기도 했다.

 

 

 

하지만 폭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코피를 흘리고 나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훨씬 뒷날, 두어 번 40계단을 오르내렸을 때...

그 중턱, '아코디언 켜는 사람'의 동상이 있는 그 즈음에서

나는 그날에 흘린 나의 코피 자국이 밟히는 것 같아서 다리가 저렸다.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