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6·25 전쟁 후방기지! 제2부두에서...

금산금산 2012. 1. 6. 21:50

[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24  

6·25 전쟁 후방기지, 제2부두에서

"서툰 영어로 군수물자 하역 통역 맡아"

 

 

                      1950년 6·25전쟁 때 부산의 부두는 유엔군과 미군을 위한 병참기지이자 후방기지였다.

             제1부두는 병사들의 수송에 이용됐고, 나머지 부두는 전쟁 물자와 군 장비, 각종 무기들의 수송에 활용됐다.

                                      사진은 1950년 부산항 제2부두에 가득 쌓인 유엔군 군수물자들.

                                      당시 부산항에는 유엔군 군수물자가 매일 부산항에 하역됐다.

                                    하역을 담당하는 부두노동자의 수가 무려 5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6·25 전쟁이 치열했던 바로 그 당시, 부산의 부두들은 엄청 큰 구실을 맡아내었다.

전쟁에 직접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유엔군과 미군들을 위한, 병참(兵站)기지이자, 후방 기지였다.

제2의 전선(戰線)이기도 했다.

이 점은 6·25의 역사를 기록할 때, 크게 강조되어도 좋을 것이다.

 

 

 

1950년 7월 초, 필자는 서울서 갓 입학한 대학을 뒤로하고 부산의 집에 와 있었다.

북한군이 서울에 쳐들어오기 전에 용케도 남보다 앞서서 피난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군 부대 지원 한국인 직원 모집 '한창'

부두서 야근…대학생 신분 전쟁에 기여

 

 

 

한데 이미 전란에 휩쓸린 부산은 '피난 수도' 또는 '임시 수도'로서 경황이 없었다.

온 시내가 위기감에 넘쳐 있었다.

쏟아져 들어온, 피난민의 무리가 더욱 위기감을 고조시키기도 했다.

거리의 분위기가 술렁대고 아슬아슬했다.

 

 

 

그런 중에 나는 멍청하게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엇인가 일이 있어야 했다.

마침 미군이 중앙동에 사무실을 차리고는 미군의 후방부대를 도울 직원들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달려갔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지원자가 몰려들어 있었다.

거의 온 종일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해서 다음날 나는 덮어 놓고 제1부두로 달려갔다.

거기서도 한국인 직원을 모집하고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부두 입구에서 경비를 맡고 있던 미군 병사의 양해를 얻어서는 부두 안 2층에 있는 인사 사무실로 올라갔다.

방안 맨 안쪽에 자리 잡고 앉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장교에게 부두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몇 마디 말이 오고 간 뒤에 그는 내게 '피어 투'로 가서 통역하라고 했다.

 

 

 

나는 '피어'가 뭐냐고 물었다.

 미군 장교는 배가 닿는 시설인데, 여기는 '피어 원'이고 바로 지척에 '피어 투'가 있다고 소상하게 일깨워주었다.

 

 

 

나는 곧장 2부두로 달려갔다.

현지의 미군 우두머리는 이미 전화로 연락을 받았다면서 흔쾌히 나를 받아주었다.

그래서 보기 좋게 또 쉽게 일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피어 투'는 제2부두를 가리킨 것이다.

 

 

 

한데 나는 다음날부터 야근으로 제2부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대학의 국문과 1학년 학생이 느닷없이 미군 통역이 되다니, 나 자신도 긴가민가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학교에서 영어는 배웠어도 회화라곤 단 한 시간도 배운 적이 없는 처지로서 문제가 많았다.

말이 통역이지, 미군과의 대화는 수시로 불통이 되곤 했다.

하지만 요행으로 흑인 장교가 도와주었다.

틈만 나면 마주 앉아서는, 부두 안의 일거리들을 소상하게 설명해주었다.

나의 서툰 발음이며 억양을 고쳐 주었다.

그게 현장에서 일하는 데 도움이 크게 되었다.

 

 

 

그 당시 제2부두는 미군과 유엔군의 군수물자들,

예컨대, 군복이며 생활도구 그리고 먹을거리 등을 전선으로 운반하는 기지였다.

통역이 하는 일은 미군 담당자가,

하역(荷役), 곧 짐을 배에서 부려서는 기차에 싣는 역할을 맡은

한국인 인부들에게 내리는 명령을 한국말로 옮기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인부들 틈서리에서 야간 근무하는 것이 심히 고되었지만, 나는 주어진 일에 몰두했다.

 

 

 

"부산에 이만한 부두 시설이 없었더라면, 전쟁에 이기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야."

 

 

 

이와 같은 흑인 장교의 말에 나는 고무되었다.

영어 몇 마디로나마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곧 전쟁에 이바지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랬다.

그 당시, 제1에서 제4까지의 부두, 그리고 중앙부두까지 모두 다섯 곳의 부두가 부산항에 있었다.

제1부두는 주로 병사들의 수송에 이바지하고

나머지 부두는 전쟁 물자와 군 장비(裝備)며 각종 무기를 수송하는 데 활용되었다.

각종 자동차며 대포들, 그리고 탱크도 실려 왔다.

 

 

 

그런 부산 부두가 없었더라면, 하고 상상하는 일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6·25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으뜸가는 전쟁 공로자로서

우리의 부산 부두는 민족의 역사에 길이 길이 크게 새겨져야 마땅하다.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