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6·25전쟁 부산의 전시 피난 대학

금산금산 2012. 1. 28. 10:48

[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25. 부산의 전시 피난 대학

포화 속 다급하게 개학 … 교양과목 고작

 

 

 

                                  6·25전쟁 때 전시 연합대학의 장소로 사용됐던 '부민관'의 1930년대 모습.

                                           이 극장은 현재 광복동 입구 한국투자증권 자리에 있었다.

                        1916년 '상생관'으로 출발해 1946년 '대중극장', 1948년 '부민관'으로 이름이 달라졌다.

                                   1953년 8월 '시민관'으로 개명됐다. 시설의 노후화로 1976년 문을 닫았다.

                            6·25전쟁 때 전시 연합대학의 공간인 부민관에서는 교양 수준의 강의만 마련됐다.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6·25전쟁이 낙동강 일대에서 한창 치열했던 그즈음,

나라의 운세가 커다란 위기에 몰려 있던 그즈음,

부산에서는 서울서 피난 온 대학들이 문을 열었다.

그 다급한 경황 속에서도 학문의 터전이 곧게 일어선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우리의 대학 역사만이 아니라, 온 세계의 대학의 역사에서도 특필해야 할 것이다.

 

 

 

1950년 7월께 그러니까,

6·25전쟁이 터진, 바로 그 다음 달께 서울서 피난 온 대학들은 개별적으로 학생들의 등록을 받았다.

나는 동대신동의 작은 집에 세든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서 등록을 마쳤다.

 

 

 

서울 모든 대학 부민관서 한데 모여 강의

영선동·구덕산 기슭 등 옮겨다니며 공부

 

 

 

그러나 대학이 곧장 문을 열지는 못했다.

강의실 하나를 마련할 여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서 서울서 피난 온 대학들이 하나로 뭉쳤다.

 

이른바 '전시 연합대학'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교사나 강의실이 마련된 것은 아니다.

광복로의 맨 동쪽 끝,

그러니까, 옛날 부산시청의 맞은편이자 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의 맞은편에 있던

'부민관'이라는 극장에서 '전시 연합대학'은 강의를 시작했다.

낡은 극장에 세를 든 대학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의 모든 대학이 참여했는데도, 위아래 층의 자리가 듬성듬성 빌 만큼 학생 수는 적었다.

대학 구별은 물론 학과 구별도 학년 구별도 없었다.

무턱대고 군데군데 모여 앉았다.

 

 

 

그런 지경이니, 강의는 전공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누가 들어도 괜찮을 만한, 어리벙벙한 제목을 단 강의,

구태여 따지자면 교양과목의 강의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속만 따지고 말 게 아니다.

그 전쟁의 법석 통에서, 내일을 미처 기약하지 못할 전란의 위기 속에서 그나마 대학이 문을 연 것은 대단한 일이다.

포화(砲火)가 난무하는 속에서 피난 온 여러 대학이 하나로 뭉쳐서 대학 본래의 업무에 복귀한 것이니,

여간 장한 일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전시 연합 대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가 대학이 부민관을 떠나서 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영도 영선동에 있는, 어느 사찰의 조그마한 부속 건물로 옮겨갔다.

대학이 한 학기 사이에 달랑달랑 이사하다니, 그것은 못 믿을 얘기일 것이다.

 

 

 

그럭저럭 한 학기를 넘겼다.

다음 봄 학기에 우리는 각자, 자기의 대학으로 돌아갔다.

우리 대학은 그 무렵, 구덕운동장 바로 뒤에 있던, 부산대학교 캠퍼스 안의 강의실에 세를 들었다.

대학이 곁방살이한 꼴이다.

하지만, 학과별로 강의가 설정되었으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가을 학기에는 우리 대학이 제자리를 찾았었다.

그래 봐야 동대신동 인근 구덕산 기슭에 천막을 다섯 채 친 것이 전부였다.

천막 대학이 개교한 것이다.

그것은 온 천하에 둘도 없을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따뜻한 날이다.

종교학 강의를 맡은 교수가 뒷산으로 가서 강의하자고 했다.

바람에 나풀대고 삐꺽 대는 천막 교실보다는 바깥이 나을 거라고 했다.

 

 

 

몇 안 되는 학생들이 비탈을 올라갔다.

비교적 평탄한 풀밭에 자리 잡고 앉았다.

가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볕이 따사로웠다.

멀리 시가지가 내리다 보이는 그 언덕 풀밭은 소슬했다.

 

 

 

산새들의 울음이 잦아지는 것을 기다려서 교수는 강의를 시작하자고 했다.

우리는 길게 편하게 다리를 뻗고 앉아서는 무릎에 노트를 펼치고 주의를 모았다.

 

 

 

종교학이 전공이라서 그랬을까?

교수는 우선 다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주여. 이 자리에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이 기쁩니다.

햇살 눈 부신 푸른 가을날의 초원에서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습니다.

주여, 감사드립니다."

 

 

 

교수는 오른손으로 가슴에 대고 십자를 그었다. 이어 '아멘!' 소리가 은은했다.

 

신도가 아닌 학생까지도 무심코 '아멘!'을 읊었다.

산새의 드맑은 울음이 이에 화답했다.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