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고원견 수원지[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4)

금산금산 2012. 11. 5. 08:40

고원견 수원지[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4)

 

 

1931년 8월 2일 오전 9시께 대신정(대신동)에 사는 최출정이라는 남자가 '고원견수원지'에서 더위를 식히다가 심장마비로 즉사했다. 시체를 오후 6시께 건져냈는데 사람들이 무척 찜찜해했다. 당시 많은 부산 사람들이 고원견수원지의 물을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접근을 금하기 위해 33년 사나운 셰퍼드 두 마리를 풀었는데 사람을 심하게 무는 바람에 이 개들을 2년 만에 팔아치웠다. 고원견수원지는 고원견산(엄광산) 자락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의 구덕수원지를 일컫는 것이다.

이 수원지는 1902년 만들어진 근대 최초의 본격적인 상수도 시설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말끔히 지워져 있다.

 

 

부산의 상수도 시설 역사는 혁혁하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차례에 걸쳐 상수도 공사를 했는데 1895년 제1기는 복병산배수지, 1902년 제2기는 고원견수원지, 1910년 제3기는 성지곡수원지로 각각 대표된다.

제1기와 제2기는 근대 최초의 상수도 공사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국사에서는 마지막 제3기 상수도 공사만 쳐주고 있다.

공식 기록에는 1908년 서울의 뚝도수원지가 근대 최초로 만들어졌고, 뒤이어 두 번째로 성지곡수원지가 축조됐다고 적혀 있다.

 

 

1902년 축조한 근대 최초 상수도 시설

한국근대사에선 지워져 있어 '아리송'

 

 

 

원래 초량왜관(용두산공원 일대, 전관거류지)의 일본 사람들은 왜관 안 우물 두 곳의 물을 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개항 이후인 1880년 물이 부족해지자 보수천에 죽관(竹管)과 목통(木桶)을 대 물을 끌어다 먹었다.

이도 모자라자 1895년 제1기 상수도 공사를 해 보수천에 물을 모으는 제언(堤堰)시설을 하고 그 물을 전관거류지의 높은 곳인 복병산배수지로 보내 거류지의 4천 명에게 배급했다. 이를 근대 최초의 수도시설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물도 부족하자 제2기 공사에 착수해 축조한 것이 고원견수원지다.

1902년 기존의 복병산배수지와 철관의 송수관 배수관으로 연결된 근대 최초의 명실상부한 상수도 시설이 설치돼

1만 명에게 물을 배급할 수 있었다.

 

 

1910년 고원견수원지는 구(舊)수도가 된다.

신(新)수도인 제3기의 성지곡수원지가 축조돼 5만 명에게 추가로 물을 공급하게 됐기 때문이다.

성지곡수원지의 물은, 이때 역시 확장한 복병산배수지로 보내져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전관거류지와 부산진, 고관, 초량 일대의 신시가지에 공급됐다.

재미있는 것은 성지곡수원지 공사 때 자재 운반을 위해 깔았던 레일이 부산~동래 경편철도 레일로 활용됐는데 수도시설의 확충이 도시교통의 확장으로 연결됐다는 점이다.

듬성하게 말하자면 고원견수원지에서 시작해 '부산 안의 수원지' 물을 먹던 부산 사람들은 1972년부터는 부산 밖(?)의 낙동강 물을 먹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