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초량과 남선창고(南鮮倉庫)!~[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6)

금산금산 2012. 11. 17. 10:10

초량과 남선창고(南鮮倉庫)!~[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6)

 

개항 이후 신초량, 초량촌으로 불린 곳이 오늘날 초량동과 영주동이다.

전관거류지 배후의 근대 초량은 아주 '묘한' 경계지역이었다.

부산항의 외국인들과 통상을 관장하던 부산감리서(봉래초등학교 자리)가 들어서고, 영국·미국·중국인들이 들어와 거주하던 다국적인 혼종 공간이었다.

 

 



애초 초량은 왜관 배후에 쓰시마 사신을 맞던 초량객사와, 역관들의 근무처인

성신당 별차처 유원각 등이 있었던 교섭의 땅이었다.

그곳에 문물이 드나들고 상인이 모이면서 초량은 바야흐로 도회(都會)로 불리기에

이른다.

도회는 온갖 욕망으로 꿈틀거렸다.

잘사는 기와집도 많았고 외국 영사관, 도살장, 잡화점, 각종 관공서, 상회가 잡탕으로 어우러졌고, 초량 유곽도 유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초량은 삼남 최초의 개성학교(봉래초등·개성중·고)를 비롯해 부산공립중학교(부산중·고) 부산항고녀(경남여중·고) 등 근대학교가 유난히 많이 세워진 곳이다.

 

 

 



근대 초량, 학교 도살장 영사관 '혼종 공간'
토착자본 상징 '남선창고' 아쉽게 사라져


초량사립야학교는 1905년에 초량객주조합이 세웠다.

일제강점기 초량상업학교로 발전했으며 해방 후 다시 발족한 현재 경남공고의 전신이다.

초량객주조합은 이 학교를 운영하면서 흥학회라는 장학회도 만들었는데

특이하게도 초량공동묘지 수익금으로 장학금을 감당했다.

1910년대 이 학교 교장이 일본 관서대학에 유학 갔다온 오형식이었는데

그는 남선창고 사장 오인규의 아들이었다.

남선창고도 '부산 재계 좌우하는 사업계의 나침반'이라는 초량객주조합이 운영하고 있었다.

 


 

1926년 설립된 남선창고는 유명한 명태고방이었다.

남선창고의 명태 눈알을 빼먹지 않은 이는 부산 사람 축에 끼지 못할 정도였다.

1900년 남선창고의 전신인 회흥사 당시부터 명태 주산지 함남 원산의 모든 명태는 부산으로 통했다.

초량객주를 통해 전국에 유통됐다.

그러다가 1914년 경원선 철도가 놓이자 원산객주들은 부산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래서 1926년 초량객주들이 아예 남선창고를 세웠던 것이다.

특기할 것은 초량객주 65명이 남선창고를 1937년까지 공동소유했다는 점이다.

이후 남선창고는 1932년 온천장에서 자본금 3만 원으로 '동래예기권번㈜'를 세웠던

이병진(김지태와 동서 사이) 집안 개인 소유로 넘어간다.


남선창고에 대한 초량객주들의 공동소유 붕괴는 일본자본에 맞서 명맥을 유지해 온

토착자본 다수균열·궤멸과 연관되지 않을까 싶다.

남선창고는 조선반도 물류의 총집산지였으며, 토착자본의 힘이 결집된 곳이었다.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의 남선창고는 혼종의 근대 공간 초량의 또렷한 상징이었으나 2008년 부서져버렸다.

 

 

 

 

 

 

 

 

*** 초량시장 인근에 있는 옛 남선창고는 1900년대 지어져 부산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헐어져 흔적만 남아있다.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