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전차!~[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7)
최학림 기자
1937년 부산우편국 앞에서 전차가 충돌했다.
이곳은 한 달 전에도 부상자 7명의 충돌 사고가 일어난 소위 '마의 교차점'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차에 치이고, 전차 안에서 아이를 낳기도 하는 등
전차는 명암이 교차하는 새로운 삶의 풍속도였다.
1933년에는 이런 전차 사고도 있었다.
양산에서 온 70대 노인이 전차를 처음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궤도 안으로 뛰어들어 크게 다쳤다.
그건 근대 조선의 꼴이기도 했다.
전차는 도시 부산을 아주 '교묘하게' 재편했다.
1909년 부산진과 동래남문을 잇는 경편철도가 놓였고,
이 궤도를 활용해 부산에 전차가 정식 개통한 것은 1915년이었다.
전차 개통에는 왜관 시절부터 유명한 동래온천에 대한 일본인들의 갈망이 있었다.
개통일 당시 '부산일보'에 전면광고가 실렸고 '전차와 동래온천'이란 맞춤형 기획기사 아래
전차, 선로, 범어사, 동래온천 봉래관(호텔농심 자리)의 사진이 실렸다.
봉래관은 1907년 무역업자 도요타 후쿠타로가 지은 연못 딸린 근사하고 유명한 여관이었다.
이 여관이 들어선 이후 동래온천 일대는 일본풍으로 바뀌었다.
1952년 부산 중구 중앙동 우편국 앞 사거리에서 벌어진 전차 충돌 사고 현장.
명소 동래온천에 대한 갈망이 개통 원동력
부산을 도심-부도심-교외로 교묘히 재편
일본은 전관거류지를 도심, 초량과 부산진을 부도심, 그리고 동래온천을 교외로 삼아 도시 부산을 직조했다. '교외'는 삶의 여유를 허영의 액세서리처럼 달고자 했던 근대인들의 이상이었다.
남선(南鮮), 아니 조선 최고의 온천과, 그 배후 금정산 자락의 금강원,
그리고 봄 벚꽃축제와 가을 단풍놀이, 동래권번의 기생과 요정들….
전차가 그 꿈을 현실화한 것이다.
동래온천이 교외로 부상하자 상대적으로 전통의 '동래'는 위축됐다.
'교묘한 재편'이라는 것은 그 말이다.
1930년 대청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현 부산 근대역사관 앞)
한 번 방향을 잡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산역전에서 동래온천까지는 40~50분 걸렸는데,
1916년께 부산우편국 앞에선 만원이라 전차를 탈 수 없었다.
그래서 부평정 종점까지 걸어가서 탔는데 여기도 벌써 30~40명이 줄을 서 있었단다.
부산~온천장 왕복할인권도 나왔고, 목욕탕 입욕권을 끼운 전차표도 나왔다.
1930년 부산부민(釜山府民)이 13만 명인데 1년간 온천이용객은 16만 명을 헤아렸다.
동래선 이후 범일정선 대청정선 장수통선 대신정선 목도선 등 여러 노선이 생겨 부산은 전차의 도시가 된다.
1920년대 중반에는 부산 인구의 25%가 매일 전차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
부산경찰서에서 '전차 도덕의 노래'까지 만들어 '냄새 나는 물품 휴대말라' '다리를 동개지 말며'
따위 내용으로 승객을 계도했다.
일본인 전차 운전수의 불친절은 '범어사 부처님도 노할 정도'였단다.
손님을 간수가 죄수 다루듯 하면서 아녀자 희롱하기는 예사였고,
목소리가 너무 커 임신부가 낙태를 할 정도였다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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