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권번!~[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9)
풍속의 역사를 들여다 볼 때 동래권번을 뺄 수 없다.
기생을 일컫는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는 꽃)란 단어부터 묘하다.
일제강점기 조선 제1의 유흥장인 동래온천장은 동래권번이 없었다면 '앙꼬 없는 찐빵'이다.
해방 후 온천장 요정 문화의 뿌리도 동래권번에 있었다.
여기에 재산과 목숨을 바친 이도 많았다.
부잣집 자식들은 선금을 주고 100~200시간씩 자기 애인을 독차지했는데
양산의 김정훈과 김해읍의 허만영은 주색잡기에 빠져 각 1만 석의 재산을 탕진했다.
동래 최부자의 사위 홍지표는 처가 재산 2천 석을 '동기(童妓, 어린 기생) 머리 얹기'에 허비하고
기생 김강월에 얹혀살다 해방 6년 전에 죽었는데 기생들이 소복을 입고 기생장을 치러줬다고 한다.
하지만 동래권번은 간단치가 않다.
그 뿌리는 왜국 사신을 접대한 동래부의 관기(官妓)에 있었다.
국경도시라는 주변부적인 성격에 뿌리를 두었다는 말이다.
임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을 따라 순절한 애첩 김섬의 절개에서 보듯
조선 때 동래 기생은 왜국에도 유명했고, 그만큼 콧대가 높았다.
그 이유가 충분했다.
학춤 살풀이 굿거리(입춤) 고무(鼓舞) 등의 무형문화재가 동래권번을 통해 이어졌다.
'한국 춤의 한 경지와 맥'이 동래권번에 있었던 것이다.
예술·절개로 콧대높은 동래부 관기에 뿌리
학춤 살풀이 고무 등 무형문화재 맥 이어
1910년 관기 박난전과 변비봉이 동래기생 조합을 만들었다.
이는 1912년 동래예기(藝妓)조합으로 변경됐다가 이후 일본식 이름인 '동래권번'으로 통칭된다.
동래권번은 전통예술학교 성격이었다.
예기들은 빠르게 7~8세, 대체로 13~15세에 돈을 내고 입학해
3년간 가·무·기예(판소리)를 종합적으로 익혔다.
동래권번 예기들은 라디오방송에도 출연하고 30년대 중반 매년 일본 공연도 갔다.
1929년 동래권번이 총파업을 했다.
몸 파는 창기(娼妓)들이 받는 신체검사를 받아라는 일제당국의 방침에 대한 항의였다.
동래권번은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하고, 동래제2보통학교 증축에 큰돈을 기부하기도 했다.
한설향 같은 예기는 화대를 모아 많은 기부사업을 하고 김만일 목사와 결혼해 뜻있는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때 동래권번의 와해를 꾀하면서 아편을 뿌리기도 했다.
초량에 1915년 봉래권번, 1940년 초량권번이 생겼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없어졌다.
하지만 동래권번은 동래국악원, 동래국악진흥회라는 이름으로 계속 명맥을 이었다.
뿌리와 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경계도시·주변부에서 피어난 꽃인 동래권번의 역사가 그러하다.
그걸 알아들으라고 '해어화'라는 말도 있지 싶다.
동래권번의 역사를 우리는 아직 다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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