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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인문 공간의 해체!~[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0)

금산금산 2012. 12. 15. 09:27

동래 인문 공간의 해체!~[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0)

최학림 기자

 

 

동래는 역사가 농축된 인문공간이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부서진다.

동래읍성 남문(옛 대동병원 자리) 해체는 매우 상징적이다.

남문은 1920년대 전통 공간을 해체한 '시구(市區)개정사업'으로 부서졌다.

당시 남문은 '고색창연한 종교' 같은 이중문으로 '경성의 남대문' 이남에서 제일로 꼽혔다.

1층 누각인 앞쪽 문은 '무기를 씻는다'는 뜻의 세병문(洗兵門),

2층 누각인 뒤쪽 문은 새가 날아갈 듯한 느낌의 주조문(朱鳥門)이었다.

남문은 임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이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며

항전했던 바로 그곳이다.

이 아름다운 이중문은 동래의 정체성을 세우려 1730년 복원했는데 그것이 없어진 것이다.

 

 

 

 

 

동래읍성 남문 철거는 실은 동래읍성 붕괴를 대변한다.

동래읍성은 중앙권력의 대행자 동래부사가 통치하는 전통 읍치(邑治)공간의 강고한 상징이었다.

1927년 전차노선을 놓으면서 서문(KT동래지점)~남문 성벽이 철거됐고,

이어 동해남부선 철도와 나란히 신작로를 놓으면서 남문~동문(동래고 인근) 성벽이 헐렸다.

 

 

 

일본, 남대문 버금가는 동래읍성남문 철거

행정·군사·경제 중심 동래, 식민공간 재편

 

 

 

동래읍성 내부도 동서방향 4개 도로, 남북방향 5개 도로를 개설하면서 완전히 훼손됐다.

동래군청 청사로 이용되던 동래부동헌 일부만 남고,

도도하게 아름답던 누각인 식파루와 정원루,

드넓던 동래부객사(동래시장)는 흔적없이 사라졌다.

동래부동헌(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호)의 바깥문 망미루(〃제4호)와 안쪽문 독진대아문(〃 제5호)은,

남문 곁에 있던 내주축성비(부산시기념물 제16호)와 함께

일본인들이 새로 만든 '교외'인 온천장 금강공원을 꾸미기 위해 번지수 없이 옮겨졌다.

역사가 한갓된 장식물로 이식·격하된 것이다.

이렇게 동래는 뿌리 뽑힌 기형적인 식민지 공간이 되었다.

 

 

 

변박의 '동래부순절도'에 보이는 남문 앞의 농주산에 있던 충렬별사의 철거도

일제가 뭘 의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곳은 임란 순절 열사의 위패를 모신 곳이었다.

일본은 충렬별사와 함께 작은 농주산을 아예 헐어버리고 이곳에 경찰서(동래경찰서)를 세웠다.

추모의 공간을 저들의 통치기구가 점령한 셈이다.

금강공원 가는 길목에 옮겨진 망미루는, 이유는 있지만 좀 웃긴다.

이 문루(門樓)의 현판(망미루, 동래도호아문) 2개는 앞뒤가 바뀌어 달려 있다.

2층 팔작지붕으로 날아갈 듯한 맵시가 없지 않은 망미루는 지금 '겨드랑이가 간지럽다,

날자꾸나'라고 외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궤멸된 동래의 인문공간은 '부산사의 많은 것'을 내장하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날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