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2)
최학림 기자
'찬란한 혼종성의 도시'라는 부산의 대표적 상징 공간이 국제시장이다.
이곳은 초량왜관 서관에서 일제강점기엔 일본인 주택이 밀집한 서정(西町)으로,
광복 후엔 국제시장으로 변모했다.
주택 밀집지가 거대 시장으로 변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일제 말 일본인들이 미군 폭격에 대비하여 이곳의 숱한 주택들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광복 당시 1만여 평의 넓은 공터였다.
마침 인접한 부평동에 1910년 개설한 조선 최초의 공설시장인 부산일한시장(부평시장)도 있어,
이 공터는 박 터지는 생존 싸움의 즉석시장으로 즉각 바뀐다.
귀국하던 일본인들도 물건을 내다 팔았고, 그들의 고리짝 하나를 5원에 낚아채 10원에 되파는 장사치들도 몰려들었는데 고리짝의 내용물에 따라 대박과 쪽박의 희비가 엇갈렸다.
돗대기시장 판자촌에 밀수품 거래
현대사 애환 승화시킨 부산의 얼굴
그러다가 부산에 몰려든 10만 명의 귀환동포들이 내놓는 물건들과, 불법으로 빼낸 미군정의 구호물자들이 이곳에 몰려나오면서 장사꾼들은 '도리(取る)'를 하려고 정신없는 쟁탈을 벌였다.
'돗대기' '도떼기' '돗다' 시장이란 말이 나온 것은 이때다.
야바위꾼은 물론 힘쓰는 '돗대기 어깨'가 즐비했다.
돗대기시장의 어감이 좋지 않아 48년 자유시장으로 불렀다가 이듬해 국제시장으로 바꿨다.
파란 눈의 미군, 마카오 양복의 신사, 다 떨어진 핫바지의 지게꾼, 형편없는 몰골의 거지와,
그리고 미군 부대 물건들이 넘치는 그야말로 인터내셔널한 시장이었다.
1953년 국제시장 화재.
알다시피 국제시장이 오늘의 국제시장으로 자리 잡은 것은 한국전쟁 때부터였다.
용두산과 국제시장 일대는 피난민들의 거대한 판자촌이 되었으며
국제시장 상권은 맨손으로 월남한 '이북파'와 '서울파'가 장악했다.
'일가 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라는 노래처럼 국제시장은
피난의 종착점이었고, 새 삶의 출발지였다.
종전 후의 허무주의는 퇴폐와 사치로 치달아 사치품 밀수가 극에 달했다.
국제시장은 마카오 홍콩 대마도에서 온 밀수품이 트럭째로 들어올 정도로
한국 밀수품 거래의 본거지가 된다.
항간에 부산을 밀수도시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국제시장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때 몇십 배 장사를 한 이들 중에 거부도 나와 '밀수 신화'를 남겼으며
'로스케' '하리마오' 따위의 조폭들도 설쳤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국제시장에는 미국 구호물자가 나돈 데서 유래한 '케네디시장' 혹은 '깡통시장'까지 있으니,
국제시장의 찌든 풍상과 얼룩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
거기에 애환으로 점철된 도시 부산과 우리 삶의 짭짤한 맛이 곰삭아 있다.
논설위원
'부산 이바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 바위 동네' 우암동!~[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4) (0) | 2013.01.12 |
---|---|
<채용신> 병풍 그림!~[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3) (0) | 2013.01.05 |
용두산!~[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1) (0) | 2012.12.21 |
동래 인문 공간의 해체!~[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0) (0) | 2012.12.15 |
동래권번!~[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9) (0) | 2012.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