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 병풍 그림!~[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3)
최학림 기자
부산박물관에 채용신의 병풍 그림 9점이 있다.
사람이 그러하듯이 작품도 시절 인연을 따라 돌고 도는 유전을 겪는다.
채용신(1850~1941)은 고종의 어진을 비롯해 대원군 이하응, 면암 최익현, 매천 황현의 얼굴을 그린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하지만 그는 무인 집안의 혈통이었다.
37세에 늦게 무과급제해 의금부에서 근무도 했다.
'칼이냐 붓이냐', 그는 갈등했을 것이다.
하지만 붓과 칼이 다르기만 한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사진 같은 그의 극세필 초상화는 칼날의 기운조차 머금고 있다.
구한말 절명의 극점에 이른 최익현과 황현의 초상은 외세를 향해 채용신이 붓을 칼처럼 휘두른 것이다.
역시 DNA는 있는 것 같다.
채용신은 탤런트 채시라의 5대 조부라고 하는데 채시라의 집안에는 서화가가 많다고 한다.
채용신이 마지막 관직을 다하고 낙향했을 때 그를 발탁한 이가 고종 때 총리대신을 지낸 윤용선이었다.
윤용선은 채용신을 알아보고 그의 그림 실력을 귀하게 쳤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이런 인연이 병풍 그림과 부산 인연의 시초였다.
순종 비, 부산 피난와서 선물로 주고 가
'돌고도는 유전' 60점 중 9점만 알려져
채용신 삼국지 연의도 中 ‘삼고초려’ 일부
윤용선은 순종의 비(妃)인 순정효황후의 증조부다.
황후는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 날인을 강요하자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춘 일화로 유명하다.
어쨌든 윤용선은 죽어서 부산 장산 자락에 묻혔다.
철종의 사위 박영효가 부산 다대포에 묻혔듯이 구한말 부산은 풍수적으로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황후는 부산에 피난을 왔다.
그때 가져온 것이 채용신의 병풍 그림이었다.
황후는 황망한 전쟁 중에도 증조부의 묘소를 정성껏 관리하는 집안에 이 병풍을 선물로 주었다.
채용신과 윤용선의 오랜 인연, 황실과의 연결 속에서 제작됐을 병풍 그림이
결국 부산까지 와서 한 집안으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채용신은 1893년부터 3년간 부산진첨사를 지냈으니 부산과 인연이 일찍이 있었다.
애초 병풍은 산수 화조 풍속을 담은 아기자기한 그림 60점을 12폭에 안배한 백납병(百衲屛)이었다.
병풍 그림은 또 한번 더 유전을 겪는다.
묘소를 돌본 집안에서는 경기도로 시집을 가는 딸에게 그 병풍을 주었다.
딸은 그 병풍을 잘라 두루마리 식으로 보관을 하다가 귀한 손님에게 그림을 한 폭씩 오려 주었다고 한다.
그 딸이 소장하고 있던 병풍 그림 9점은 지난 2009년 부산박물관에 기증됐다.
나머지 51점은 아직까지 유전을 겪고 있는 것이다.
채용신의 그 그림들은 어떤 인연을 더 겪을는지….
채용신 ‘적벽대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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