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동 안동네!~[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5)
최학림 기자
전포동과 경계인 황령산 자락의 문현동 산 23의 1.
이곳이 '돌산마을' '벽화마을'로 불리는 '문현동 안동네'이다.
이 동네는 공동묘지 위에 이루어진 초유의 마을이다.
삶과 죽음은 늘 같이 가는 것이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묘지와 함께
사람 사는 마을이 형성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250채 320여 세대 950명이 사는 이 마을에는 지금도 80여 기의 무덤이 있다.
골목, 집 뜰과 현관, 장독대, 창문 밖에 무덤이 있다.
가족과 자손들이 해마다 성묘하러 찾아오는 무덤들이다.
비근한 예로 부산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일본인들의 공동묘지를 헐고
비석을 건축자재 삼아 형성한 마을로 현재 이곳에 무덤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문현동 안동네는 묘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마을의 먼 역사는 다소 흐릿하다.
공동묘지는 일제강점기부터 만들어졌다고 하고, 한국전쟁 피난민이 와서 살았다고도 한다.
이 마을에 45년째 살고 있다는 공말선(68)씨의 증언에 따르면 1967년 20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고무공장과 연탄공장을 다니는 20대 젊은 부부가
무덤 사이에 루핑으로 지붕만 세운 판잣집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 망해서 오갈 데 없어 올라온' 사람들로 이뤄진 이 마을의 역사는 불법건축과 철거의 반복이었다.
70년대 중반 개금동 반여동으로 정책 이주를 시켰는데 다시 돌아온 이들도 많다.
무덤 80기와 함께 사는 공동묘지 마을
80년대 중반 본격 형성된 '벽화 산동네'
놀랍게도 이 마을이 지금 규모로 형성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올림픽 때 부산은 최고 호경기를 누렸다.
이때 외지에서 부산으로 유입된 이들이 곳곳에 불법건축물을 지었는데 그때 이 마을이 커진 것이다.
당시 공권력은 큰 행사에 쏠려 이곳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철거는 계속되었는데 28번이나 집을 철거당한 이도 있다.
이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96년, 상수도가 놓인 것은 2002년이라는 사실도 놀랍다.
수도와 전기를 공급하지 않으면 판잣집이 들어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문현동 산 23-1
50년 이상 '암흑지대'에 있던 이 마을이 널리 알려진 것이
2008년 400만 원의 예산으로 시작한 벽화 그리기였다.
벽화가 세상의 관심 속에 마을을 새롭게 그려낸 것이다.
공공디자인 상도 받아 내친김에 2010년 3억 5천만 원의 예산으로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던 돌산공원 등을 주민 참여로 깔끔하게 조성했다.
지금 문현동 안동네는 부산에서 가장 늦게 형성된 산동네이면서 대표적 산동네의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도 재개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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