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이주'!~[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6)
최학림 기자
이전에 취객이 "동상동~ 갑시다"하면 한 번 더 물어보는 택시 기사가 있었다.
"영도 쪽이오, 동래 쪽이오?"
'영도 동삼동'과 '동래 동상동'이 헷갈렸던 것이다.
이 때문에 동상동은 1982년 서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이 부산의 대표적인 정책 이주지이다.
68년 조성된 서1동 주택가 지도를 보면 똑같은 모양의 골목과 건물들이 종횡으로 늘어서
흡사 모눈종이 칸처럼 일정하게 빽빽하다.
서동은 당시 영주·수정·충무동의 원도심 산동네 1만 5천 세대를 부산 외곽 8곳(신평·장림·당리·연산·서·반송·대연·망미동 총 68만㎡)으로 집단 이주시킨 곳의 하나다.
1950~70년대 이뤄진 '인구 분산 배치'와 '정책 이주'는
부산의 도시 공간과 주거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부산은 개항 이후 100년 사이에 인구가 150배나 비약적으로 팽창한 도시다.
특히 해방과 한국전쟁 때 '인구 폭탄'은 원도심에 집중해서 떨어졌다.
원도심에 떨어진 인구 폭탄과, 그 인구가 외곽으로 옮겨진 것이 도시 부산의 형성사이다.
전쟁 때 집중된 원도심 인구 외곽 분산책
60~80년대 초 몇 차례 걸쳐 '부산' 형성
귀환동포 20만 명은 원도심과 더불어 범천·범일·당감·문현·우암동 집단 거주지에 뿌리내렸다.
한국전쟁 때 '땅끝 부산'에 온 피난민들의 삶은 처참했다.
총 50만 명 중 30만 명이 원도심의 산비탈에 팍팍한 삶을 송곳처럼 꽂았다.
이게 산복도로 동네의 원형이다.
'났다 하면 불' '부산 아닌 불산'의 악명을 드날린 대화재들은
숱한 판잣집을 잿더미로 만들었지만 살아야 할 목숨이 있는 한,
끈질기게 지어진 것이 판잣집이었다.
산비탈에 자리잡지 못한 피난민들은 괴정 새마을과 청학·양정·우암동에 분산 배치되었다.
그 전에 자연부락이 있던 이들 동네는 인구 분산 배치로 전혀 달라졌다.
이런 변모가 '부산 공간'을 이루었던 역사다.
68년 정책 이주는 도심 불량주거지를 외곽으로 옮긴 것에 불과했다.
기반 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은 데다 택지만 주고 집은 알아서 지으라는 식이었다.
73~81년의 정책 이주는 다소 나아졌다.
73~75년 반여·용호·개금·주례·만덕동에 2~4세대의 연립주택을 만들어 1만 세대를 집단 입주시켰고,
76~81년 사직·덕천·전포·재송동에는 시영 및 주공 임대아파트를 지어 5천300세대를 이주시켰다.
이렇게 해도 91년 당시 부산의 불량주택은 7만여 채,
전국 비중 42.5%를 차지했을 정도이다.
한국전쟁으로 한순간에 만들어진 도시가 부산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 치부가 한국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부산의 역동적이고 찬란한 특색이 되고 있으니 인생사의 새옹지마를 도시도 겪는 모양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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