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1> 신선대 스토리텔링- 바람들, 용당포로 몰려오다
"어찌 아냐, 신선 발자국을 밟고 있으면 나도 신선이 될지…"
1951년의 부산 용당포는 한적하고 평온한 전형적인 어촌이다.
서구 열강의 이양선이 출몰하던 150여년 전에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진 제공=김한근(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아그작, 곰의 탈을 쓰면 마늘 생각이 났다
마늘을 씹어대면 조롱을 참을 수 있었다
그때, 풍의 눈에 깃든 바람을 보았더라면
바람을 눌러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저절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았다간, 되레
불길을 일으켜 생명을 앗아갈 수 있을 터
바람은 흐르는 대로 두어야, 그래야 산다
그는 다시 마늘 한 쪽을 입에 넣고 씹었다
바닷바람이 먼저 독한 냄새로 달려 왔다
창우는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마늘 한 쪽을 집었다. 아그작, 입에서 마늘 으깨지는 소리가 났고 알싸한 향이 입 안을 채웠다. 안줏거리로 요놈의 통마늘을 씹어댄 것이 얼마였던가. 사당패의 일원이 되어 곰춤을 추기 시작한 때부터였던가. 곰의 탈을 쓰면 이상하게 마늘 생각이 났다. 마늘을 먹으면 사람들의 조롱을 참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다른 광대와 달리 특출한 재주가 없었다. 그랬기에 탈을 둘러쓰고 구경꾼을 불러 모으는 바람잡이 역할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의 춤을 보며 킬킬거렸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감춰둔 은밀한 욕망을 자극하는 묘한 춤사위. 마치 발정을 참지 못해 기둥을 붙잡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행동을 보면서 어떤 이는 슬쩍 다가와 아랫도리를 비벼대곤 했다. 역겨웠지만 그는 그런 비역질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돈이 사람의 중심을 차지한 지 오래였으므로. 돈만 있다면 양반의 족보도 살 수 있었고 떠도는 생활의 종지부도 찍을 수 있었다.
면천! 그건 창우의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마늘을 수없이 삼키며 참았지만 면천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돈이 모이기는커녕 하루하루 연명하기에 더 바빴다. 그는 그제야 알았다. 곰의 탈은 벗고 싶어도 벗을 수 없는 운명의 굴레임을. 어쩌면 사월이는 먼저 알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푼돈에도 양반들 앞에서 쉬 가랑이를 벌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는 그런 사실을 모른 채 그녀를 나무랐다.
흥, 밑구멍이 중요해? 입구멍이 중요해? 그녀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아랫도리로 양반 물건을 넣지 않으면 입으로 들어오는 게 없다는 걸 안 다음이니까. 그래서 더더욱 사월이에게 마음이 쏠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되레 표독스럽게 굴기만 했다. 천한 년에게 마음 주면 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듯이.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던 사월이. 그 원망의 독주가 사월이의 목숨을 앞당기게 했을까. 이름처럼, 꽃피는 사월에 그녀는 훌쩍 다른 세상으로 갔다. 제 붉은 살점, 단점이만 남긴 채.
오늘날 부산 남구 용당동(용당포)은 신선대 컨테이너 터미널 등 초대형 부두로 변모했다
오늘날 부산 남구 용당동(용당포)은 신선대 컨테이너 터미널 등 초대형 부두로 변모했다. |
사월이 없는 곳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다. 창우는 짐 보따리를 쌌다. 왜관이 있는 부산포. 그곳에 가면 왜인뿐만 아니라 청인, 심지어 산둥의 한인까지 드나든다는 사실을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상상하곤 했다. 배를 타고 면천이 필요 없는 곳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단지 사월이 때문에 지금껏 망설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사월이도 없으니 사당패에 미련조차 없었다. 하지만 단점이를 보는 순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단점이가 어느새 깨어나 두 눈을 글썽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자다가 깼는데도 해맑게 빛나는 눈. 그 눈을 보자 도저히 혼자 내뺄 수가 없었다. 갈 거면 퍼뜩 일어서라. 어린 여식을 대동했으니 발걸음이 느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스스로 자처한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럴 때마다 창우는 부러 고개를 들어 하늘의 붉은 해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사월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단점이를 부탁해, 그 애가 곧 나니까.
부산포는 멀었다. 길을 가는 중간 중간에 숙식까지 해결해야만 했다. 자연 남의 집 품앗이를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단점이는 차근차근 제 뼈를 키워갔다. 덩달아 젖가슴과 엉덩이도 커졌다. 왜관 문턱에 닿았을 때에는 처녀티가 물씬 풍길 정도였다. 왜관 건물은 웅장했다. 마치 낯선 세상에 온 듯했다. 하지만 이국인은커녕 그 많다던 왜인들은 쉬 보기 힘들었다. 왜관은 또 다른 금단의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다. 한창 뼈를 키우는 단점이의 주린 배부터 챙겨야 했다. 제 이마의 붉은 점이 지울 수 없는 화인이란 걸 깨닫기 전에. 그는 꼭꼭 동여맨 탈을 다시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곰춤을 구경하는 이는 드물었다. 흥이 없으니 춤을 출수록 서러워졌다. 쪼그리고 앉은 단점이를 봤다. 한데 단점이의 입이 한껏 부풀어 있는 게 아닌가. 저 하얀 주먹밥을 누가 준 것일까. 놀란 눈을 했을 때, 곁에 선 사내 하나가 그를 향해 웃었다. 이름이 풍이라고 했다.
차라리 그때, 풍의 눈에 깃든 바람을 보았더라면 어찌되었을까. 단점이의 운명이 바뀌었을까. 창우는 홰홰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이것 또한 운명일지 몰랐다. 바람을 닮은 녀석. 녀석의 몸속에 든 바람 또한 이 땅이 만들어낸 것, 그걸 어찌 막는단 말인가. 바람을 눌러 죽이는 방법은 없다. 저절로 제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았다간 되레 불길을 일으켜 제 생명을 앗아갈 수 있을 터. 바람은 흐르는 대로 두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어쩌면 단점이야말로 바람 없이는 날아오를 수 없는 방패연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둘이서 저리 어울려 산이며 바다를 헤맬 수밖에. 단점이에겐 열고 보나 닫고 보나 풍은 과분한 남자였다. 더군다나 풍이야말로 제 배를 몰며 면천할 필요조차 없는 평민이니까. 하지만 짝을 이루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게 창우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의 나이도 이제 쉰이 넘었다. 그러니 떠나보내야 한다. 그는 다시 마늘 한쪽을 입에 넣고 짓씹었다. 바닷바람이 마늘보다 먼저 독한 냄새를 풍기며 달려왔다. 가을이 오긴 오는 모양이었다.
*
아야, 단점이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터졌다. 젖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풍이의 손길이 멈칫 했다. 그렇게 세게 만지면 어떡해, 아프단 말야. 단점이가 홍조 띤 얼굴로 샐쭉거렸다. 콧소리가 진득하게 배인 것이 그다지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런 단점이의 교태가 외려 풍의 아랫도리로 피를 쏠리게 했다. 너, 잠깐만 뒤로 엎드려봐. 아이, 왜 이래? 여기선 싫어. 잠깐이면 돼, 어서. 누가 오면 어쩌려구? 이 늦은 시각에 누가 여기까지 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풍이는 얼른 단점이를 돌려세웠다. 그리곤 재빨리 치마를 올리고 고쟁이는 내렸다. 벌써 여러 번 해본 솜씨였다. 어둑해진 사위 탓에 단점이의 엉덩이는 달처럼 환하게 빛났다. 그 뽀얀 엉덩이 사이로 어렴풋이 드러나는 그녀의 하초. 그걸 보는 순간 풍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일찌감치 나뭇가지같이 딱딱해져 있던 그의 아랫도리를 단점의 엉덩이 사이로 디밀었다. 단점이의 입에서 아흡, 하는 소리가 터졌다. 풍은 그 소리를 신호로 제 엉덩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맴돌던 선들바람마저 몰려와 풍이의 엉덩이에 달라붙어 힘을 보탰다. 풍이의 엉덩이가 밀어젖힐 때마다 단점은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아 바위를 움켜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늘따라 풍의 행동은 더 거칠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입술을 으깨어 물기만 했다. 눈 아래로 펼쳐진 바다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멀리 왜관과 해안을 따라 흩어진 마을에서도 하나둘 불빛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너, 설마 왜놈한테 꼬리친 건 아니지? 기어이 풍이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졌다. 단점이가 왜관 앞, 조시(朝市)에 다녀온 것이 화근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왜관이란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교역을 위해 장기 거주하는 왜인들도 먹어야 하므로 생필품 구입은 필수였다. 그러니 이른 아침이면 왜관의 입구에 시장이 생겨날 수밖에. 한데 언제부터인가 왜놈들은 제 은근한 속내를 얼비치기 시작했다. 남자의 물건이 아니라 아낙의 물건만 족족 구입한 것이다. 풍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생선은 팔아야 했고 그에게 가족은 없었다.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생목숨을 잃었다. 홀아비가 된 아버지가 동냥젖으로 그를 키우다시피 했다. 하지만 아버지마저 도지도 내지 않고 양반 땅을 경작했다고 관가로 끌려가 태질을 당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어머니를 따랐다. 사람들은 혀끝을 찼다. 쓸모없는 땅이라고 맘대로 하라고 할 땐 언제고 공들여 개간하고 나니 빼앗아 간다고. 그는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서러운 건 그런 더러운 양반들이 설치는 세상이었다. 그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그가 다시 웃게 된 건 곰춤 때문이었다. 양반을 보고도 대놓고 겁 없이 달려가 엉덩이를 씰룩대던 춤. 관아의 기둥을 붙잡고 희롱을 해대는 사설에 그만 파안대소하고 말았던 것이다. 웃음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두 사람을 자신의 아래채로 이끌었다. 그게 벌써 오 년 전의 이야기였다.
오늘 따라 생선 파는 아낙이 웬만해야지. 단점이가 반달눈을 만들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해가 저물도록 거기 있었냐? 그럼, 어떡해? 팔지 않고 그냥 돌아와? 안 팔리면 먹어치우면 되지 뭐. 그럼 쌀보리는 어떻게 사? 에이, 제기랄. 풍은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말았다. 양반 꼬라지만 봐도 속 뒤집히는 판에 왜놈 눈치까지 봐가며 살아야 하다니. 안 그래도 생선 배만 따며 사는 것이 답답해 미칠 판인데. 그는 테액, 하고 가래침을 돋우어 뱉었다. 그런 풍의 속내를 안 것일까. 단점이가 엉뚱한 화제를 들고 나온다. 오라베를 알다가도 모르겠어. 뭐를?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내 생각은 하기나 하는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이 오라베가 탈이다. 그래서 여기만 맨날 올라오는 거야, 그럼? 어느새 하늘에도 별들이 총총하게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여기 오면 답답한 속이나마 조금은 달랠 수 있거든. 저기 저 까치섬과 절영도만 봐도 한 걸음을 훌쩍 뛰어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에게게, 신선 같은 말씀 하고 계시네. 어찌 아냐, 신선 발자국을 밟고 있으면 신선이 될지. 근데 신선이 탔다던 말 발자국이 진짜 있긴 있어? 궁금하면 찾아봐, 말발굽처럼 생긴 무제등이란 바위가 있긴 있으니까. 말을 끝낸 풍이 먼저 엉덩이를 들었다. 서둘러 내려가지 않으면 길을 헤맬지도 몰랐다. 삭망이 가까워졌으니 달빛은 기대하긴 힘든 밤이었다. 풍이 성큼성큼 산을 내려가자 단점이가 뒤에서 소리쳤다. 혼자 가면 어떡해, 같이 가!
*
오라베, 얼른 나와 봐! 꼭두새벽부터 단점이가 마당가에서 소리쳤다. 풍은 누운 채 꼼짝하지 않았다. 필시 그를 일찍 깨워 바다로 물일을 나가게 하려는 수작이겠거니 했던 것이다. 이상한 배가 떠 있다니까, 빨리 좀 나와 보라구! 단점이가 다시 방을 향해 소리쳤다. 풍은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다. 근래 들어 만사가 귀찮았다. 그런 심드렁한 마음 탓일까. 잠자리에 누웠지만 머릿속은 뒤숭숭했다. 그 바람에 잠을 설쳤다. 그는 부러 코고는 소리를 냈다. 단점이의 채근이 시들해지기를 바라면서.
한데 그때 창우의 말이 뒤를 이었다. 허허, 이거 구봉에서 봉화가 오를 일이구먼! 봉화란 말에 그는 눈을 화들짝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봉화라니? 그럼 어디 전쟁이라도 났단 말인가. 짚신도 챙겨 신지 않은 채 마당으로 달려 나왔다. 사실이었다. 여태 듣도 보도 못한 모양의 낯선 배가 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봐왔던 배가 아니었다. 그는 눈을 비빈 다음 다시 배를 살폈다. 규모도 컸고 모양도 특이했다. 저게 어디서 왔죠? 풍이 창우에게 다가가 물었다. 글쎄, 왜선도, 청선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북선도 아니니 나도 궁금할 따름이네. 근데 도대체 저 배가 언제부터 와 있었죠? 허허, 그걸 알면 내가 일찌감치 돗자리를 깔았지, 여기 있겠나. 그때, 풍의 뇌리에 뭔가 스쳤다. 혹시 신선이 타고 온 배가 아닐까요? 허어, 이 사람. 신선이 학이나 말을 탄다는 말은 들었어도 배를 타고 돌아다닌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네. 아저씨가 듣지 못했을 뿐이겠죠. 신선은 있대도 그 양반들이 아주 깊은 산속에 은둔하지 비린내 나는 여기까지 찾아올 리 있겠나? 그럴 수도 있죠. 어찌 알아요, 여기 신선대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 선생이 다시 찾아왔는지? 난 신선 같은 건 믿지 않네. 그럼,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밖에요. 그는 호기롭게 바닷가로 몸을 틀었다. 이보게, 풍이. 너무 가까이는 가지 말게. 창우가 풍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소설가 이상섭 |
■ 약력
● 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 2002년 제5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 소설집 '슬픔의 두께' '바닷가 그집에서, 이틀' 등
●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 백신애문학상 등 수상
■취재지원:
▷김용민(부산남구 홍보담당) ▷김한근(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이용득(부산세관박물관장) ▷이정은(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간사)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남구
※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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