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3> 신선대 스토리텔링- 바람, 회오리를 일으키다
아, 바다의 끝에는 천국이 있을까… 불국토가 있을까?
◇ 팩션- 저기 둥둥 떠 있던
- 신선대엔 왜 올라가보자는 걸까
- 윌리엄은 두루마리에 지형을 그렸다
- "풍, 홧 이즈 디스 리즌 콜드?"
- 함장이 제 발 밑을 가리키며 묻자
- 풍은 여긴 조선이라고 답을 했고
- 그는 지도에 'Chosan Habour'라 썼다
- 마을사람들은 이양선으로 몰려갔다
- 배에 올라 구경하느라 정신없었다
- 선원들은 통제마저 포기한 눈치다
- 아침나절 군졸에 끌려간 풍에게
- 통제사는 역적질을 했다고 호통쳤고
- 주민들의 이양선 접근도 금해졌다
1885년 영국의 동양함대가 전남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고 찍은 당시 주민들의 모습. 이보다 88년 전 영국 해군 선박이 부산 용당포(신선대 일대)에 정박할 당시 현지 주민들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산으로 향하는 걸음발은 더뎠다. 생각보다 길은 가팔랐으며 큰 바위도 많았다. 윌리엄은 특이한 나무나 풀을 보면 어김없이 풍을 불렀다. 향신료라도 발견한다면 의외의 횡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탐사를 하는 것도 옷감과 향신료를 팔기 위한 교역로 확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풍의 반응에 따라 윌리엄은 직접 냄새를 맡거나 씹어서 맛을 보거나 표본까지 채집하는 열성을 발휘할 수밖에. 정상에 섰을 때에는 햇살이 이우는 중이었다. 바다는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윌리엄은 가져온 두루마리 종이를 펼쳐 해안 지형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덕에 만의 안쪽까지 훤히 내려다보였다. 만의 중앙에는 수십 채나 되는 희고 웅대한 건물이 위치해 있었고 그 앞에 정박한 배들도 보였다. 발 아래로는 계단처럼 논이 펼쳐져 있었고 풀밭에는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중이었다. 존이 소를 보자마자 풍을 향해 소리쳤다. 위 니드 투 해브 섬씽 투 잇. 하우 마치 이즈 댓 카우? 풍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손사래를 쳤다. 소는 팔 수 없는 존재요. 저 동물은 우리에겐 또 하나의 식구란 말이오. 그래서 우리는 생구라고 부른다오. 풍의 눈치를 살피던 존은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풍의 완강한 말투로 보아 로스트비프는 물 건너갔다고 여긴 것이다. 존의 표정을 풍이라고 놓쳤을 리 없었다. 저기 돌아다니는 개는 얼마든지 줄 수 있소. 우린 저걸 애완동물이 아니라 식용으로 기르니까 말이오. 풍이 왈왈, 개 짖는 소리까지 내자 앨런이 풍을 째려보았다. 제 성의 유래를 말하는 것이 불쾌한 듯이. 스케치를 끝낸 윌리엄이 방위각을 측정하기 위해 지남철을 꺼냈다. 하지만 지남철이 말썽을 일으키는지 고개를 갸웃거려댔다. 윌리엄이 풍, 하고 소리쳤다. 풍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홧 이즈 디스 리즌 콜드? 풍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홧 이즈 디스 리즌 콜드? 함장이 손가락으로 제 발밑을 가리켰다. 여긴 조선이라오. 쵸산? 그렇소, 조선이란 나라요. 오케이, 쵸산. 윌리엄은 지도 아랫부분에 'Chosan Habour'이라고 명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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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포에 정박한 영국 프로비던스호의 브라우턴 선장. |
단점이와 함께 이양선에 올랐을 때에는 몰려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사람들은 이양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져보고 재보고 때려보고 심지어 발로 굴러보기도 했다. 창우도 배에 올라온 후 놀란 눈을 감출 수 없었다. 다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크고 튼튼한 배를 만들다니. 만약 이런 배가 수십 척이 몰려온다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찌 될까.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지 않을까. 파란 눈의 선원들은 통제마저 포기한 눈치였다.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잡담만 나누고 있었다. 창우는 선원 곁으로 다가갔다. 이거, 선물이오. 맛이라도 좀 보시오. 창우가 고구마가 든 바구니를 건넸다. 그러자 파란 눈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구니 속을 살폈다. 그러더니 이내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신선대로 향했던 다른 일행이 돌아왔다. 동행한 풍은 함께 오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두머리인 모자가 왔는데도 선원들은 아랑곳없이 고구마 맛을 평하기에 바빴다. 풍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는 엄격함이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자유뿐이었다. 서로 격의 없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눈치 보지 않는 행동. 그렇다면 저들이 사는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면천이 필요 없는 땅일까. 불현듯 창우도 그들의 나라가 궁금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단점이는 아이들처럼 배를 구경하느라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느새 빨간 머리털의 앨런이 음탕한 눈으로 단점이의 뒤태를 훔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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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그린 부산항 항박도. 부산항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한 그림 자료다. 사진은 김재승 저 '근대한영해양교류사'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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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새벽부터 풍은 부지런을 떨었다. 어제 신선대에 올랐을 때, 존이 해가 뜨면 오겠다는 의사를 몇 번이고 몸으로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풍은 하늘부터 기웃거렸다. 구름도 구경삼아 죄다 이곳으로 몰려온 것인지 사방은 안개로 가득했다. 그는 안개를 뚫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잘 마른 소나무 장작과 채소를 확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겨우 여유를 찾았을 때에는 사방이 훤해진 다음이었다. 풍이 늦은 아침을 먹고 부랴사랴 백사장에 섰을 때에도 이양선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다시 배 모양을 살폈다. 몇 번이고 봤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기만 했다. 돛이 두 개인 배는 이곳에도 많다. 하지만 이물에 저렇게 삼각 돛대를 한 배는 없었다. 저 삼각돛이 배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조종하는 노와 같은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바람을 이용해 진로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지혜. 그들은 이미 그걸 터득하고 있는 듯했다. 저렇게 바람을 효율적으로 이용한다면 배의 속도 또한 빨라지는 법. 그렇다면 바다의 끝까지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아,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긴 서학에서 말하는 천국이 있을까. 아니면 불국토가 있을까. 풍은 저 배를 타고 바다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 장작더미를 메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풍의 곁으로 군졸들이 다가왔다. 자네가 풍이란 작자인가. 예, 그렇소만. 그럼 우리와 함께 통제사 나으리께 가세. 아니, 수군통제사 나으리께서 무슨 일로 나를 찾는단 말이오? 다 이유가 있으니까 보자는 것이 아니겠나, 얼른 나서게. 풍이 도망가기나 할 듯, 군졸 두 사람이 재빨리 달려들어 겨드랑이를 팠다.
양인들이 신선대에 올라 무엇을 하였다고? 통제사의 물음에 풍은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묻는 대로 대답할 뿐이었다. 유람하듯이 오른 후 그림을 그렸사옵니다. 그림을 그려? 분명히 네가 직접 눈으로 보았느냐? 예, 세필 붓 같은 것으로 그림을 그리는 걸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럼, 그림의 속도 보았느냐? 왜관이며 마을 위치, 그리고 절영도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네 이놈, 그걸 보고서도 아직 네 우둔함을 깨닫지 못했단 말이냐?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놈들은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부산포의 지도를 그렸단 말이다. 지도라니요? 그건 지도가 아니라 그림이었을 뿐입니다. 허허, 이놈이 아직도 제 가 한 짓을 모르는구나. 제가 한 짓이라뇨? 임진년에 대마도 돌중 현소(玄蘇)가 왜놈을 길잡이 노릇 한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풍은 잠시 우두망찰했다. 임진왜란을 어찌 부산포 사람들이 모를 리 있겠는가. 이 일을 어떤단 말인고, 임신년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이 나타나 또다시 정체 모를 적을 불러들이는 우를 범하다니. 여봐라, 얼른 이놈을 오라로 묶어 옥방에 가둬라. 풍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적을 불러들이다니, 그럼 내가 역적질을 했단 말인가. 역적질은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등 뒤에서 통제사의 목소리가 다시 쩌렁쩌렁 울렸다. 이 시각 이후부터는 주민들의 이양선 근접을 일체 금하라. 그리고 지금 당장 이양선의 수괴를 만나 그 지도를 회수하리니 어서 빨리 출정 채비를 차리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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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선 접근을 금하자 사람들도 일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논으로 나가 물꼬를 보거나 피를 뽑기도 했고, 어떤 이는 소꼴을 베러 나서거나 밭의 고구마를 캐기도 했다. 창우도 아침상을 밀자마자 짚신을 엮느라 처마 밑에 엉덩이를 부렸다. 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도대체 풍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잡아갔단 말인가. 그깟 이양선 무리들과 어울렸다고?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을 도운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죄라면 먼저 내 나라를 침범한 저 양인들이 저지른 게 아닌가. 잡아가려면 양인을 잡아가야지 왜 풍을 잡아간단 말인가. 창우의 입에서는 연신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안 그래도 발 탄 강아지마냥 자리에 가만있지 못하는 풍이 때문에 속을 태우던 단점이. 그녀는 또 얼마나 애간장이 탈까. 그러니 대책도 없이 자성대로 달려가지 않았겠는가. 창우는 차라리 이번 일로 단점이가 마음을 달리 먹었으면 싶기도 했다. 그게 사랑하는 풍이를 위하는 길이었다. 남성 평민과 여성 천민의 결혼은 여성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 그게 조선의 율법이다. 천민이 된다는 건 인간이 아닌 동물로 산다는 것. 그 사실은 누구보다 창우가 평생 동안 겪은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다음에 생각해도 될 일. 우선 급한 건 끌려간 풍이였다. 창우는 답답한 마음에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흐릿한 태양이 정수리 위에 앉아 있었다. 이 정도의 시각이 흘렀으면 단점이가 돌아올 때가 넘었다. 창우는 바깥 동정이라도 살필 겸 돌담 앞으로 가서 섰다. 이양선 무리 몇몇이 땔감과 식수를 배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댕기머리 선원 하나가 자꾸 풍의 집을 쳐다보는 게 아무래도 존인 모양이었다.
■ 약력
소설가 이상섭 |
● 2002년 제5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 소설집 '슬픔의 두께' '바닷가 그집에서, 이틀' 등
●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 백신애문학상 등 수상
■취재지원:
▷김용민(부산남구 홍보담당) ▷김한근(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이용득(부산세관박물관장) ▷이정은(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간사)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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