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4> 신선대 스토리텔링- 바람, 다시 멀리 멀리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려면 이양선을 타는 수밖에 없소
1950년초 부산 남구 감만동 일대의 모래구찌 전경. 센 파도가 치면 부서질 것 같은 낡은 배와 해안에서 일하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이런 풍경은 이양선이 출몰하던 18세기 말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 같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제공. |
◇ 팩션- 저기 둥둥 떠 있던
- 양인들이 지도 그리는 걸 도왔다고
- 오라베를 가두고 만나지도 못하게 해요
- 단점이는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 깊은 밤, 뭔가 쿵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 마당 한가운데 풍이 쓰러져 있었다
- 존이 풍을 구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고?
- 갑판 위에서 위기를 직감한 풍은
- 사정없이 단점이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 "뱃속에 우리 아기가 자라고 있소"
- 두 사람을 태운 배는 점점 속도를 냈다
그래, 저간 사정을 알아보았더냐? 단점이가 나타나자 창우가 다급하게 묻고 나섰다. 아저씨, 이를 어째요? 오라베가 역적질을 했다네요. 역적질을 해? 네, 양인들이 지도를 그리는 걸 도왔다고 옥방에 가둬놓고 만나지도 못하게 하던 걸요. 단점이는 기어이 참았던 울음을 마루 밑에 뿌렸다. 창우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 그렇다고 이렇게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도 없잖은가. 무언가 해야 하는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헤이, 풍! 보트로 땔감을 나르던 존이 난데없이 나타났다. 아까부터 집 쪽을 바라보는 꼴이 수상하더니 그새 풍과 정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하긴 정은 한순간에 생기는 게 아니라 쌓이는 거라 했던가. 풍은 잡혀갔소. 당신들 때문에 말이오. 존은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홉떴다. 우리 오라베가 이렇게 두 손을 오랏줄에 묶여 끌려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신들이 책임지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을 절대 보내줄 수 없어요! 단점이가 눈물을 훔치며 왜장을 쳤다. 그런 호소 탓일까. 존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창우가 다시 나섰다. 풍이를 살리려면 당신들이 그린 지도가 필요하오. 저 위에서 이렇게 네모난 종이에다 그린 그림 말이외다! 그것만이 풍을 여기, 이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소. 존은 창우의 몸짓을 한동안 지켜보더니 되물었다. 더 맵? 비코즈 오브 댓? 존은 양팔을 동원해 무슨 말인가를 한참을 중얼댔다. 그래도 말이 통하지 않자 제 가슴을 몇 번 쳐대고는 마지못해 돌아섰다.
사람이 만든 공간에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쓸쓸해지는가. 이양선이 닿은 지 벌써 이레째. 마을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했다. 하지만 풍이 잡혀가고 난 후 창우와 단점이의 일상만은 뒤바뀌고 말았다. 풍은 창우와 단점이를 위해 아래채를 선물했다. 그리고 자투리 채전까지 마련해주었다. 그런 풍의 넉넉한 가슴이 있었기에 오늘의 그들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은인을 구하기는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답답할 노릇이었다. 오늘도 두 사람은 마루청에 앉아 목만 길게 내뺐다. 이제 식료품마저 실었으므로 이양선은 곧 떠날 터였다. 이양선이 떠나고 풍이 돌아온다면 마을도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풍은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다. 대체 지도에 무슨 군사비밀이 들었기에 풀어주지 않는단 말인가. 눈 달린 사람이면 다 아는 이곳 풍광을 지도로 수십 장을 그린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숨기고 감추어야 할 강산이라면 왜 왜선은 맘대로 이곳으로 들락거리게 하느냔 말이다. 정말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오늘 따라 심란하게 빗방울까지 심란함을 부추기고 있었다. 비를 맞고 백사장 앞에 댕기머리 존과 군졸들이 마주보고 섰는 게 보였다. 채 싣지 못한 물품이라도 있는 것인가. 선원 중 제일 바쁘게 움직이는 건 존밖에 없었다. 존의 손에는 두루마리 같은 길쭉한 것이 쥐어져 있었다. 존은 그 물건을 군졸 앞에 바투 갖다대고 흔드는 꼴이 두루마리 때문에 언쟁이 붙은 것만 같았다.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일까. 존이 허리에 찬 총을 꺼내들었다. 지켜보던 창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존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총을 겨누었다. 타앙! 소리가 나기 무섭게 달려가던 개가 퍽, 쓰러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놀란 군졸들이 창을 버리고 줄행랑을 치기 바빴다.
깊은 밤이었다. 뭔가 쿵,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창우와 단점이는 동시에 방문을 열었다. 마당 한가운데 풍이 쓰러져 있었다. 오매, 풍이 오라베! 단점이가 맨발로 뛰쳐나갔다. 그리곤 풍을 부둥켜안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흐흐흑, 나도 죽는 줄 알았다니까, 오라베가 보고 싶어서. 근데 이 꼴이 뭐야.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 창우는 송진가지에 불을 댕긴 다음 소리쳤다. 뭐하는 거냐? 고생한 사람, 방으로 들이지 않고? 불빛 아래 눕히고 보니 풍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옷은 피와 흙으로 엉망이었으며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몸도 성한 곳이 없었다. 곳곳에 멍과 매질의 흔적이 오롯했다. 창우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 사람을 이런 꼴로 만들다니, 쯧쯧. 급히 물을 끓여 몸을 닦았다. 상처에 수건이 닿을 때마다 풍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풍을 이부자리에 눕히니 닭이 울었다. 풍의 입에서 신음소리도 잦아졌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창우가 묻고 들었다. 그래, 이제 좀 정신이 돌아오는가. 풍이 여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영 자네를 못 보는 줄 알았네. 나도 못 보는 줄 알았소. 근데 어떻게 풀려났는가? 존 때문이오. 존? 예, 존이 지도를 넘겼소. 창우의 눈이 반짝였다. 저들의 방문 목적이 지도 작성에 있다면 그것을 쉬 내놓을 리 없었다. 자네 눈으로 넘겨준 지도를 똑똑히 보았는가? 예, 보았소. 그럼, 그 지도가 맞던가? 풍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존이 풍을 구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단 얘기가 아닌가. 창우의 가슴이 둥둥 북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풍이 입을 연다. 그 양반들, 존이 떠나면 나를 다시 옥죌 것이요. 그렇다면? 그렇소.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소. 풍이 제 어금니를 으드득, 갈았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으므로 절대 내어줄 수가 없다는 듯이. 오라베 혼자 보낼 순 없어. 나도 갈 테야. 죽어도 같이 죽기로 맹서했잖아, 우리! 창우는 방바닥이 꺼져라 숨을 내몰았다. 이 둘을 어쩌란 말인가. 저 지독한 사랑은 어쩌란 말인가. 지도가 거짓임이 밝혀진다면 풍은 죽은 목숨이다. 그렇다면 길은 풍이의 말대로 한 갈래뿐이란 말인가. 두 사람은 창우가 있든 말든 부둥켜안고 해후의 감정을 나누기에 바빴다. 창우는 헛기침 몇 개를 떨어뜨리고는 밖으로 나섰다.
*
별이 떴다는 건 날이 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날씨 탓에 묶여 있었다니 해가 솟는다면 필시 이양선은 뜰 것이다. 그들의 항로가 대마도라 했던가. 그렇다면 오륙도 근처로 지나갈 것이다. 거친 바람과 파도를 피하려면 뭍 가까이 붙을 것이 당연한 법. 그럼, 그들이 떠나기 전에 모처럼 흥이라도 내볼까나. 창우는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켠 후 버릇대로 통마늘을 씹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마늘 냄새가 역겨웠다. 허허, 웅녀처럼 이제 나도 인간이 다 된 것인가. 왜 늘 먹던 마늘이 고약하게 느껴진단 말인고. 창우의 발은 어느새 광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태 무슨 미련이 남아 곰탈과 가죽옷을 버리지 못했을까. 오늘을 위해 그런 것일까. 창우는 곱게 모셔놓은 곰의 탈을 꺼냈다. 조금 상하긴 했으니 무두질을 잘해놓아 털이며 모양은 그대로였다. 더군다나 어제 낮에 기름을 바르고 털까지 손질해놓은 터였다. 윤기가 흘러야 멀리서도 뚜렷이 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곰의 탈을 만지자니 곰춤을 처음 가르쳐준 웅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곰은 말이야, 습성상 끌어당길 줄만 알았지 밀어낼 줄을 모른다네. 그것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다네. 웅노인은, 그러면서 그냥 창만 겨누고 있어도 곰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곰 스스로 창마저도 잡아당겨 제 가슴을 찌르기 때문에. 그러고 보니 그의 삶 또한 곰이나 마찬가지였다. 밀어내지 못해 제 스스로 상처를 입고 마는. 사월이를 제 마음에서 밀어낼 용기가 있었다면 창우 또한 그렇게 깊은 가슴앓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창우는 회한이 파도처럼 밀려옴을 느꼈다. 기실, 단점이와 풍이도 사월이와 다를 바 없었다. 창우는 이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았다. 이젠 끌어당길 것이 아니라 밀어내는 방법도 배워야 할 때임을. 창우는 천천히 곰털 가죽옷까지 껴입었다. 오랜만에 완전한 분장을 하니 옛일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마음은 그지없이 편했다. 덕분에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오고 덧뵈기 춤사위까지 터졌다.
창우와 풍은 나란히 배에 앉아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눈길은 바다가 아닌 까치섬 쪽이었다. 기회를 놓쳐 난바다로 들어선다면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니 돛이 바람을 제대로 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간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곰의 탈과 가죽은 눈에 잘 뛰는 이물에 뉘어놓았다. 창우는 다시 누워 있는 곰에 눈길을 주었다. 소를 구입하고자 한 작자들이니 곰을 본다면 그냥 지나칠 리 없을 것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하네. 풍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점인 내 자식 같은 아이네. 부디 잘 돌봐주게. 그러고는 창우의 눈은 곧장 까치섬 쪽으로 돌아갔다. 아저씨는 어쩌실려구요? 난 걱정 말게, 개똥밭 구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잖은가. 창우의 눈에 흰 돛을 올린 채 만을 빠져나오는 이양선이 보였다. 때가 온 것 같네, 어서 서두르게. 창우는 낚싯줄을 팽개치고 얼른 노를 움켜쥐었다. 시킨 대로 얼른 수건을 흔들게나. 창우는 힘껏 노를 젓기 시작했다. 헤이, 존! 윌리엄 선장! 여기 선물을 준비했다네. 가져가게! 몇 번이고 소리쳐도 이양선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사이 두 배의 거리는 자꾸 멀어지고 있었다. 여기 곰고기네, 얼른 와서 싣고 가게! 창우의 턱까지 숨이 차올라 소리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배는 멀어질 뿐이었다. 두 사람이 낙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뜻밖에도 이양선의 뱃머리가 서서히 그들의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다가오기 시작했다. 천리경을 쥔 채 동정을 살피는 윌리엄과 그 곁에 선 존까지도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펼친 돛마저 내려지자 창우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어서 배에 오를 준비를 하게! 창우의 말에 풍이 조심스레 곰을 등에 업기 시작했다. 곰이 살아 있는 듯 풍의 등 위에서 꿈틀했다. 존이 재빨리 풍을 향해 사다리를 내렸다. 풍은 곰을 업은 채 창우를 돌아보았다. 뭐하는가, 얼른 서두르지 않고! 창우가 잽싸게 다그쳤다. 풍이 줄을 잡고 이양선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창우는 고개를 들어 풍의 행동을 살폈다. 그러다가 풍이 갑판 위에 무사히 올라서자 재빨리 반대편으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곰을 보고 먼저 달려든 건 빨간 머리털 앨런이었다. 모처럼 육고기로 뱃장구를 두드리나 싶었는데 튀어나온 건 여자였다. 선원들도 놀란 표정을 하기에는 앨런과 마찬가지였다. 망원경에 눈을 붙이고 있던 윌리엄은 선원들의 웅성거림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갑판 위에 웬 여자라니. 윌리엄은 재빨리 배가 있던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곰을 싣고 온 배는 이미 한참을 멀어진 다음이었다. 윌리엄은 선원들 사이를 헤치고 여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존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 여잔 풍의 계집입니다. 이들이 왜 우리 배를 탔는가, 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들은 이곳에 있으면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모든 게 존, 자네가 꾸민 짓인가? 제너럴, 전 그런 계략을 꾸민 적은 없습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윌리엄과 존의 주고받는 대화가 심상찮은 것은 풍도 눈치 챘다. 지켜보던 풍이 큰소리로 말했다. 삯은 얼마든지 지불하겠소. 대신 우리를 존의 나라까지만 데려다 주시오. 존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윌리엄이 다시 존을 노려보았다. 이 모든 일은 전적으로 자네 책임이 크네, 지금 당장 두 사람을 하선시키게. 함장님! 난바다에서 내린다면 그건 죽으라는 얘기 아닙니까? 어차피 죽을 목숨들이잖은가. 존은 잠시 말을 잃었다. 앨런이 칼을 쥔 채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풍은 뜻하지 않은 위기를 맞은 것을 직감했다. 무언가를 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열렬히 갈망해야 한다. 윌리엄! 풍의 목청에 윌리엄이 고개를 돌렸다. 풍이 사정없이 단점이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윌리엄의 눈이 커졌다. 이것 보시오. 뱃속에 우리 아기가 자라고 있소. 그래도 내리게 할 참이오? 윌리엄은 잠시 말을 잃고 서성였다. 길리스단? 단점이가 손가락으로 윌리엄의 목에 걸릴 십자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길리스단이라니, 이 목걸이가? 그 순간 윌리엄의 머릿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혹시 길리스단은 크리스찬을? 윌리엄은 낯선 이방인의 입에서 자신들이 경배하는 신과 관련된 단어가 나오자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일단 돛을 올리게! 윌리엄이 선원들을 향해 명령했다. 두 사람의 처분 문제는 잠시 미룰 생각이었다. 어차피 길은 멀었으므로 천천히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배는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풍은 곁에 있던 단점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멀리서 이기대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약력
소설가 이상섭 |
● 2002년 제5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 소설집 '슬픔의 두께' '바닷가 그집에서, 이틀' 등
●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 백신애문학상 등 수상
■취재지원:
▷김용민(부산남구 홍보담당) ▷김한근(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이용득(부산세관박물관장) ▷이정은(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간사)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남구, 국제신문
-팩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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