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2> 신선대 스토리텔링- 바람과 바람의 조우
해무 속에서 엄청난 크기의 이양선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1951년 부산 남구 감만동에서 바라본 영도. 1797년 영국 해군 소속의 프로비던스호가 정박한 곳이 용호동 신선대와 감만동 앞바다 일대로 추정된다. 사진 제공=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 팩션- 저기 둥둥 떠 있던
- 바닷빛을 닮은 파란 눈에 빨간 머리털
-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해괴한 얼굴
- 배 위 덩치 큰 사내가 외쳤다 "후아유?"
- 대체 이건 뭔 말이고 이들은 누구인가
- 갑판 위에 오르자 덥석 손을 움켜쥔다
- 뭐라는지 뜻을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 몸짓 대화를 나누며 긴장이 풀어졌다
- 부사 나리와 다시 이양선을 찾아가자
- 긴 수염· 검은 모자를 쓴 함장이 나왔다
- 그는 종이에 알파벳 글씨를 써내려갔다
바다는 아직 해무를 덮고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풍은 배의 고삐를 풀어 바다로 향했다. 노를 저어 나아갈수록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의 형체는 뚜렷해졌다. 생각보다 배의 크기가 엄청났다. 이렇게 큰 배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 배를 몰고 왔을까. 낯선 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풍의 심장은 밖으로 뛰쳐나올 듯 쿵쾅거렸다.
안에 누가 있소? 그가 손나발을 만들어 배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고함을 해무가 덜컥 삼킬 뿐, 인기척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낯선 배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귀에 낯선 언어가 날아와 달라붙었다. 방금 뭐라 했던가. 후아유라고 했던가. 후아유라니? 도대체 이건 어느 나라 말인가. 그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판 위에 덩치 큰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놀라 바다로 풍덩 빠질 뻔했다. 여태 본 적이 없는 해괴한 얼굴 때문이었다. 얼굴 가운데에는 금정산을 올려놓은 듯 코가 오뚝했고, 눈동자는 바닷물을 담아놓은 듯 새파랬다. 게다가 머리털마저 길게 땋아 내리고 있어 계집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세상에 저런 인간들이 있다니. 대, 댁은 뉘시오? 어,어디서 오셨소? 홧 해픈? 홧 디스 리즌 콜? 홧, 뭐라고 사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사내의 말뜻을 헤아리긴 힘들었다. 두 사람은 결국 합죽입이 되어 서로 멀뚱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천천히 사내를 살피기 시작했다. 사내는 앳돼 보였다. 그의 나이쯤 됐을까. 입성 또한 특이했다. 소매가 좁아 군졸이 입는 복색 같았다. 아무래도 군함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또 다른 남자가 얼굴을 디밀었다. 이번에는 빨간 머리털을 한 사내였다. 빨간 머리털은 손에 작은 칼까지 쥐고 있었다. 그가 움찔 놀랐든지 배가 휘청거렸다. 빨간 머리털이 재밌다는 듯이 칼을 만지작거리며 킬킬거렸다. 낯선 사내들이 하나둘 갑판으로 몰려나왔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수였다. 그제야 그는 왜 배의 운두가 이렇게 높은지 이해가 갔다. 그때, 멀리 구봉 봉수대에서 봉화가 피어올랐다. 마을사람들도 물일을 나서다가 방향을 바꾸어 이양선(異樣船)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
1885년 거문도를 무단 점거한 영국 해군 소속의 970톤급 함대. 이보다 약 90년 전 부산항 신선대 해안을 찾은 영국 선박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재승 저 '근대한영해양교류사' 사진 인용 |
윌리엄이 전날의 항해일지를 정리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났다. 누군가? 제너럴, 존입니다. 존이라면 식료품을 담당하는 초심자였다. 어리고 경험 없는 그를 발탁한 건 명민함 때문이었다. 자네는 왜 이번 탐사에 자원했나? 역사를 다시 쓰고 싶어서입니다. 역사라니? 영국의 역사가 곧 세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 발자국을 함장님과 함께 찍고 싶습니다. 발자국을 찍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건 모르는가? 제가 죽으면 그것 또한 영국의 역사요 세계사가 될 것입니다. 윌리엄의 입에서 절로 오호, 하는 소리가 터졌다. 존의 똑똑함은 금세 드러났다. 존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함장의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아서 움직였다. 그랬기에 선박에서 제일 중요한 식품부를 맡긴 것을 이번 항해에서 제일 잘한 일로 여겼다. 그런 믿음직한 존이었으므로 윌리엄은 반갑게 그를 맞았다. 모처럼 푹 쉬라고 했더니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지금 흰옷을 입은 자들이 배 주위에 몰려와 있습니다! 보고를 들은 윌리엄은 약간 당혹스러웠다. 흰옷? 그래, 그 자들이 무기를 들었던가? 맨손인 것으로 보아 싸우려는 의사는 없어 보입니다. 그래? 그럼,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게나. 어차피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니 말일세. 예스, 써! 존이 소리치며 선실을 나섰다.
*
댕기머리 사내가 줄로 만든 사다리를 드리웠다. 그런 다음 댕기머리는 풍을 향해 소리쳤다. 손짓으로 보아 올라오라는 듯했다. 풍은 잠시 망설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백사장까지 사람들이 몰려나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자 괜히 그의 어깨가 한 뼘 올라갔다. 그는 천천히 사다리를 밟았다. 갑판에 오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해괴한 모양의 모자가 그의 앞으로 나섰다. 보아하니 모자가 배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웰컴 투 컴 인 아워 십! 이게 뭔 소린가. 아침부터 씹이라니. 이것들이 혹 여자 생각이 나서 찾았나. 모자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이니 안심하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망설일 것도 없잖은가. 얼떨결에 풍도 모자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자가 덥석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풍의 어깨를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모자가 무슨 말인가를 했지만 그의 귀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혹시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소? 풍이 말했다. 모자는 대답 대신 댕기머리 사내를 바라보았다. 헤이, 존! 댕기머리 사내의 이름이 존인 모양이었다. 존이 모자에게 다가갔다. 한동안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 빨간 머리털은 계속 칼을 매만지며 풍을 노려보았다. 성질 고약한 위인임이 틀림없었다. 존이 풍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나불거리면서 몸짓을 해댔다. 입 안으로 무언가 삼키는 흉내를 내는 것으로 보아 마실 것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벌컥벌컥? 물은 마을에 가면 얼마든지 있소. 존이 말이 통한 것이 기쁜지 박수까지 쳐댔다. 이번에는 배 가운데 위치한 화덕을 가리키며 불 피우는 시늉을 했다. 불과 땔감도 줄 수 있소. 오케이! 존이 다시 손을 입으로 가져가 씹는 흉내를 냈다. 아, 먹을 것? 그것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소. 풍은 존과 몸짓으로 대화하면서 서서히 긴장이 풀림을 느꼈다.
무슨 일로 왔대, 어디서 왔대? 풍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단점이가 다짜고짜 묻고 들었다. 몰라. 풍은 벌러덩 마루청에 몸을 눕히고 말았다. 말을 해봤을 거 아냐? 말은 무슨, 통해야 얘기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그럼 물이랑 땔감, 뭐 그런 게 필요한 건 오라베가 어떻게 알았어? 그냥 손짓 발짓으로 대충 때려잡은 거지. 근데, 너 정말 내가 가자면 어디든 간다고 그랬지? 갑자기 그런 왜 물어? 그냥 대답이나 해봐. 단점이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연다. 나야 뭐 오라베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더 있어? 근데 어디로 갈 건데? 어디를 가든. 암튼 넌 단단히 마음만 먹고 있어. 그래놓고 풍은 질끈 눈을 감았다. 잠이 모자라 그런지 눈알이 다 아렸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피곤이 몰려왔고 그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아니나 다를까 이양선의 파란 눈들이 마을로 오고 있었다. 일행을 인솔한 이는 역시 이상한 모자를 쓴 양반이었다. 그는 마당을 빠져나와 골목으로 달려갔다. 헤이, 프렌드! 풍이 나타나자 일행 중 누군가 소리쳤다. 존이었다. 프렌드가 아니라 내 이름은 풍이라우, 풍! 풍풍? 아니, 풍! 풍? 그래, 이 답답한 존아. 존? 존이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이 놀라운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풍이 파란 눈의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자 마을 사람들은 놀라운 표정으로 일제히 풍만 쳐다보았다. 훼어 캔 아이 겟 워러? 존이 말했다. 워러가 뭐라? 풍이 눈을 치떴다. 워러, 거듭 말하며 존이 손에 쥐고 있던 물통을 들어 올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계곡 쪽을 가리켰다. 일행은 계곡으로 경쟁하듯이 달려갔다. 신선한 물이 간절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물통까지 채운 뒤 보트에 차곡차곡 실었다. 그 와중에도 모자를 쓴 사람은 천리경에 눈을 디밀고 주변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마을로 향했다. 모자는 틈틈이 뭔가를 기록했고 마을을 지난 다음에는 왜관 쪽으로 걸음을 다잡았다. 왜관으로 가자면 자성대를 지나야 했다. 그랬다간 존과 모자 일행은 군졸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다. 풍이 모자 앞에 나섰다. 멈추시오. 더 갔다가는 배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소. 모자는 무슨 일인지 몰라 눈을 키웠다. 당신들은 죽을지 모르오, 저기엔 활과 창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있소! 이윽고 모자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축조된 성벽엔 포의 진지로 보이는 구멍들이 오롯이 드러나 있었다. 모자도 그걸 본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모자가 몸을 돌려세웠다.
*
풍이, 방에 있는가. 창우의 목소리였다. 부사 나으리께서 뵙자고 친히 행보를 하셨네. 얼른 나와 보게. 부사라면 동래부사 정상우 나으리란 말인가. 그 분이 이런 누추한 가옥까지 방문하다니.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풍은 화살처럼 잽싸게 달려 나와 마당에 엎드렸다. 자네가 이양선의 뱃사람들을 제일 먼저 만났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예, 소인이 확실하옵니다. 그래? 그럼 그 서양인들이 용당포에 온 목적이 무엇이라 하던가. 그는 아는 대로 그 연유를 설명했다. 배에 필요한 물품 때문에 온 것 같다고.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부사가 다시 물었다. 혹시 사람을 해칠 무기는 싣지 않았던가. 대포가 있었으나 쏜 적이 없으며 외려 저를 손님처럼 잘 대해주었습니다. 손님처럼 너를 대했다? 예, 그러하옵니다. 그럼, 네가 앞장설 수 있겠느냐? 아무래도 내가 그들을 직접 만나봐야겠다.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엄연히 신분이 지배하는 세상, 그걸 넘어뜨리려는 순간 제가 자빠질 수도 있었다. 아버지처럼 저항했다가는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할 수도. 그는 바닷가로 잰걸음을 쳤다.
*
풍이 낯선 사람들을 이끌고 배로 왔다. 존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는 풍을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었다. 데리고 온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보였다. 긴 수염은 아마 그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수염을 드리우고 머리에는 중앙이 높이 솟은 커다란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망사였고 모자의 지름은 3피트나 될 정도였다. 그 큰 모자를 끈으로 턱에 매었는데 손에는 칼과 부채까지 쥐고 있었다. 칼의 손잡이는 은으로 장식되어 있어 은의 가치는 그들도 알고 있는 듯했다. 동행한 짧은 수염을 한 사람이 윌리엄 함장 앞으로 나섰다. 지금껏 쓰지 않던 낯선 언어를 쓰는 것으로 보아 통역관인 듯 싶었다. 하지만 그 말마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다른 사람이 나서서 또 다른 언어를 구사했다. 알아듣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윌리엄이 종이 위에 알파벳을 써내려가자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이건 뭐 글자가 산과 구름을 닮았구먼. 그들은 돌아가며 글자를 살폈다. 하지만 읽어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낭가사기'라는 말을 듣자 그들은 눈빛을 파닥였다. 나가사키라면 일본의 장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끼리 웅성거렸다. 그걸 눈치 챈 윌리엄이 대마도 근처를 가리키며 입으로 바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들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약력
● 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 2002년 제5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 소설집 '슬픔의 두께' '바닷가 그집에서, 이틀' 등
●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 백신애문학상 등 수상
■취재지원:
▷김용민(부산남구 홍보담당) ▷김한근(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이용득(부산세관박물관장) ▷이정은(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간사)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남구
※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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