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리아 부대!~[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7)
최학림 기자
1950년대 하야리아 부대 인근 주민이 미군에게 '해피 뉴욕'이란 인사를 했던 적이 있다.
'해피 뉴이어'를 잘못 배운 거였다.
당시 일부 주민은 '포리에잇'이란 것을 미군에게 팔았는데 마흔여덟 가지 체위가 그려진 야한 등사물이었다.
동네 꼬마들은 지나가는 미군들에게 '갓뎀'이라는 욕을 하면서 '산토끼' 노래를 개사해 불렀다.
'양갈보 똥갈보 어디로 가느냐 깡총깡총 뛰어서 할로(미군)한테 갈 테야~.'
주민과 미군의 간단한 상거래는 '유 바이 램프?' 따위의 콩글리시 구사와 지폐 1장으로 해결되는 식이었다. 50년대 집 앞에 '란더리(세탁)'라고 붙여놓으면 미군들이 세탁물을 가져왔고 '원 달러'로 오케이였다.
'란더리'는 주민과 미군이 처음 대면한 기회였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부산에 남긴 많은 것 중 하나가 하야리아 부대였다.
일제강점기에 경마장과 군사시설, 해방 직후 다시 경마장이 들어선 곳,
그러나 대부분 주민들이 불하받아 소유하던 농지에 미군이 밀고 들어와 만든 것이 하야리아 부대였다.
전쟁 통에 미군 PX물자는 물론 공구들도 부대 밖으로 대량 유출됐다.
부대에서 유출된 공구들은 인근에서 팔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서면 공구상가를 형성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한국전쟁 때 생겨 이색 기지촌 문화 형성
시민의 땅 '부산시민공원' 재탄생 눈앞에
술은 멀리 가서 먹는지 미군들이 술에 취해 총질을 일삼던 초량 골목은 '텍사스 골목'이 되었고,
욕정은 가까이서 푸는지 부대 옆에 집창촌인 '범전동 300번지', 속칭 '태평시네마 300번지'가 들어서
전형적인 기지촌 풍경을 만들었다.
마을 처녀 중 양공주가 생기기도 했고, '아이노꼬'란 놀림을 받은 혼혈 2세도 생겼다.
한국 여자와 결혼한 미군 사병들은 마을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풍기문란한 이색 문화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셈이었다.
주민들은 빈 마당에 불법으로 방을 지어 세를 냈고,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는데 '풍기문란'이 대수일 수 없었다.
60~80년대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와 미군 수천 명이 부대에 묵으면서 미군을 상대하는 마을 장터가
생기기도 했다.
아무리 높은 담장과 철조망으로 분리돼 있어도 이색적인 것들이 엉겨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사람의 삶이다.
하야리아 부대 일대의 기지촌 문화도 부산 현대사의 한 모퉁이를 점하고 있다.
92년 인근 진양화학의 부도로 노동자들이 많이 떠나는 등 부대 인근 마을은 90년께부터 쇠퇴했다.
2006년 하야리아 부대는 해체됐고 그 부지는 바야흐로 부산시민공원으로 탄생하기 직전에 있다.
하야리아 부지 반환 시민운동의 늠름한 성과다.
개장 1년여를 남겨 놓은 부산시민공원,
최학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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