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바위 동네' 우암동!~[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4)
최학림 기자
"저거 보세요. 번듯한 '소막'의 모습이 겉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이잖아요."
소막, 혹은 소막사는 우사(牛舍, 외양간)를 일컫는 말이다.
지난 6일 돌아본 우암동시장 일대 마을은 범일동 매축지마을만큼이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골목 폭도 좁은 곳은 1m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 개축해 소막 모습이 남아 있는 집은 몇 곳에 불과하지만
푸른 페인트로 칠한 소막의 삼각형 지붕과 환기창이 그대로다.
어떤 집의 이해할 수 없는 삼각형 외곽은 옛 소막의 흔적이라 한다.
우암동(부산 남구)은 부산사의 애환이 깊숙이 깃든 동네다.
1930년대 적기만 매축(제7부두 일대)으로 이곳에 항구가 들어섰다.
매축 때 이 동네의 상징인 '바다를 굽어보는 늠름한 소 바위'가 부서져 버렸다.
그 소는 제7부두의 어느 곳에 묻혀 있을 것이다.
이곳은 소와의 인연(?)이 질겼다.
적기부두에서 일본으로 소를 수출하면서 소 검역소와 2천400마리까지 수용하는 소막 40동이 생겼다.
해방이 되면서 부산에 20만 명의 귀환동포들이 몰려들어 우암동도 그들의 집단거주지가 된다.
그때 일제가 남겨논 소막들이 판잣집으로 바뀐 것이다.
일제강점기 수출 소 검역소, '소막' 있어
귀환동포·피난민 판자촌서 유래한 동네
한국전쟁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우암동은 또다시 변한다.
피난민 7만 명을 수용하는 피난민 수용소가 된 것이다.
'소막 판잣집' 동네가 확장되면서 오늘날 우암동이 이때 거의 이뤄졌다.
함남 내호동에서 냉면 장사를 하던 집도 우암동으로 피난 왔는데 이 집에서 밀가루 구호품으로
냉면을 만든 것이 부산밀면의 원조를 이루어 60년 가까운 역사를 잇고 있다.
이 냉면 집의 역사는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된' 경우처럼
피난 와서 부산 사람으로 뿌리내린 우암동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대변하는 것일 테다.
피난 시절 천막과 판잣집을 전전하던 성당이 지금의 동항성당이다.
'부산항 동쪽' 위치라고 붙여진 그 이름은 이 동네의 가로축을 이루는 거리 '동항로'의 이름이 되었다.
우암동 역사는 그뿐이지 않다.
초량왜관 시절에는 표류하던 일본인을 수용·인도하던 '표민 수수소(漂民 授受所)'도,
60년대에는 '뻘배'라고 하여 영도를 오가는 통선도 있었는데 지도를 보면
이곳이 감만반도 안의 아늑한 포구였음을 느낄 수 있다.
그 포구가 귀환과 피난의 역사로 점철된 부산사의 애환을 심부에서 온전히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실핏줄의 미로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따뜻한 정감의 골목들을 걸으면
우암동이란 동네 이름이 유래한 옛 소가 '미지의 울음'을 아직 울고 있는 듯하다.
'삶의 흔적을 역사로 보존하라'는 울음일 것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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