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산!~[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11)
최학림 기자
용두산은 부산 근현대사가 옹골지게 농축된 곳이다.
1876년 부산 개항 때 이곳엔 항해의 안녕 등을 비는 기복의 신을 모신 일본 신사 4개가 있었다.
근처의 용미산 신사는 임란 선봉장군 가등청정을 신으로 모시며 야욕의 틈을 벌리기는 했다.
하지만 모두 잡초 엉킨 폐사라 할 만큼 별찮았다.
1915년 용두산
개항 후 신사는 정비되는데 그것은 방귀깨나 뀌는 실력자를 구별짓는,
이른바 부산거류민단회 자체의 위계 질서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돈을 내놓을 수 있는 자가 실력자였고 용두산이 그 가늠자가 된 것이다.
1908년 서부 시가지(부평동) 팽창으로 용두산에 종횡도로(광복로 초입~중앙성당 쪽)가 나는데,
이는 용두산이 전관거류지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는 말이다.
1915년 근대공원 탄생 '제국의 神社'
판자촌 우남공원까지 부산사 깊숙이
1915년은 용두산이 근대공원으로 태어난 전기였다.
5월 일왕 즉위 축하제전과 11월 신사 제전은 '깃발의 터널'과 '등불의 바다'를 연출하며
부산이 일주일씩이나 떠들썩할 정도로 대단했다.
부산상업회의소에서 '동아(東亞)의 현관인 부산 체면을 위해 공원 조성이 최대 급무'라는 논의도 나왔다.
이듬해 3단 구성의 용두산공원이 만들어져 신사가 제일 높은 곳(부산타워 자리)으로 옮겨졌다.
공원을 오르는 4개 길이 났고 1927년에는 194계단이 놓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는 전차를 타고 가다 차장이 '용두산 신사 앞!'이라 외치면
승객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절을 할 정도로 용두산은 황국신민정책의 거점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시간 앞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던가.
광복과 한국전쟁은 용두산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만들었다.
일본 신사는 부서졌고, 해발 49m의 작은 산에 1만여 명이 개미처럼 엉겨붙은 거대한 판자촌이 들어섰다.
용두산은 귀환과 피난의 찌든 상징이 됐다.
그러나 54년 12월 대화재는 벼랑에 매달린 애옥살이마저 모두 태우고 8천 명의 이재민을 내면서 용두산을 시커먼 재와 울음으로 뒤덮었다.
귀찮은 판자촌을 아예 철거하자는 권부의 논의는 결국 용두산을 공원으로 귀결시켰다.
55년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일을 맞아 용두산은 이승만의 호를 가져온 '우남공원'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을 하야시킨 1960년 4·19혁명으로 우남공원은
다시 '용두산공원'이라는 옛 이름으로 돌아갔다.
용두산은 파란만장한 파노라마의 시간 과정을 웅숭깊게 누적시키고 있는 '뜨거운 곳'이다.
용두산은 금정산맥이 수정산맥으로 옷을 갈아입고
시퍼런 부산 바다 앞에서 용틀임하며 머리를 치켜든 형상이라 한다.
부산사를 품은 그 용틀임의 의미는 뭘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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