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당!~[최학림의 근현대 부산 엿보기] 5)
부산의 근대사는 매축과 떼려야 뗄 수 없다.
1900~1930년대의 숱한 매축으로 오늘의 부산이 만들어졌다.
이를테면 이런저런 '새마당'이 만들어진 과정이었다.
원래 조선시대에 일본과 교역을 위해 내준 용두산 일대의 초량왜관은 부산 모퉁이의 고립된 땅이었다.
그 고립된 땅이 매축을 통해 외연을 넓히며 도시의 중심지가 되는 과정이
일제가 기획한 식민지 공간의 탄생이었다.
그걸 걷어낼 치욕이라 치부해버릴 수 없는 것은 삶이 숱한 상처와 얼룩을 통해 숙성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개항이 되자 고립된 왜관 땅에 그 얼개를 빼닮은 11만 평의 근대 시가지가 형성됐다.
먼저 1900년대 2차례에 걸쳐 북항이 매축됐다.
이때 옛 부산역(세관 앞쪽), 세관, 제1부두, 부산우체국이 있는 일대의 중앙동이 탄생했는데
용두산과 복병산을 잇는 산줄기는 북항을 메운다고 잘려 대청로가 되었다.
부산착평공사, 도시형태 획기적으로 바꿔
새마당은 일제 매축 상징 보통명사 가능
근대 시가지가 초량과 부산진으로 확장하려니 장애물이 있었다.
변박의 '초량왜관도'를 보면 가느다란 영선고갯길 옆에 바다를 접하고 있는 해발 130척의 나지막한 쌍산(雙山), 영선산과 영국영사관산이 그것이다.
오늘날 중부경찰서에서 영주고가교 조금 못 미친 지점까지 있던 이 두 개의 산을 허물어 앞바다를 메운 것은 부산의 도시 형태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대공사였다.
이 영선산착평공사를 부산착평공사(1909~12년)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전히 고립돼 있던 신시가지의 길이 비로소 활짝 열렸던 것이다.
대륙과 연결을 획책한 경부선 철도도 비로소 신시가지의 북항과 연결되었다.
이때 확보된 땅은 4만 4천780평에 불과했으나 옛 부산역 앞에 너른 마당이 생겼다고 떠들썩하게 매축지를 새마당이라 이름지어졌다.
'새마당 매축지' 비는 지금 도시철도 중앙역 인근 가로에 있다.
영선산 착평공사장면 뒤쪽이 있는 건물 옛 부산역사
이 고유명사 '새마당'을 보통명사로 바꾸면 식민지 근대 도시 부산의 형성사가 된다. 1913~17년 부산진 매축 14만여 평,
1916~26년 영도 대풍포 매축 4만여 평,
1928~34년 남항 매축 14만 5천 평,
1934~44년 적기 매축 30만 평 등은 부산항 해안선의 기초로 부산의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빠뜨릴 수 없는 게 있다.
한 예로 부산진 매축은 총독부의 특혜 아래 나고야 자본가들이 참여해 진행됐다.
이때 표호(瓢號)라고 명명한 준설선이 일본 오사카 철공소에서 부산으로 왔다.
나고야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신지였는데
준설선의 '표(瓢)'는 도요토미의 문양에서 가져온 글자였다.
매축을 진행한 그들의 생각 속에는
임란의 도요토미가 현재형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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