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신 영도다리…[만남과 부활] <중> 영도다리 '사람들'

금산금산 2014. 2. 1. 18:50

 

신 '영도다리'…[만남과 부활] <중> 영도다리 사람들

46년 세월… 배의 강판을 '깡깡' 때릴 때마다 '교각'은 더 강해졌다

 

 

 

지난 27일, 부산 영도구 대평동 동아조선 작업장에서 한 '깡깡이 아지매'가 연삭기로 어선 강판에 달라붙은 패류와 녹을 제거하고 있다. 김화영 기자

 

- 인근 대평동·남포동 해안가에서
- 선박청소·약초상·점바치 등으로
- 오랜 시간 묵묵히 역사를 쌓으며
- 영도다리를 '떠받친' 주인공들
- 다리와 영원히 함께하고픈 바람


영도다리를 떠받치는 교각(橋脚)은 다리 아래에만 있는 게 아니다.

부산 영도구 대평동이나 중구 남포동 해안에도 있다.

'깡깡이 아지매', 점바치(점쟁이의 사투리), 약초재상, 건어물상….

영도다리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주변 사람들이 또 다른 '교각'이다.

두 교각은 어깨를 겯고 있다.

같은 눈높이에서 묵묵히 서로를 지켜보며 영도다리의 역사를 쌓아왔다. 그래서 '영도다리' 하면 자연스레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  "영도다리는 우리의 목숨줄"

   

망치로 배의 강판을 깡깡 두드리며 작업을 한다 해서 붙여진 별명

'깡깡이 아지매'.

'깡깡이 아지매'는 영도다리와 똑 닮았다.

일제강점기와 6·25 피란시절 등 영도다리가 겪은 시련의 세월만큼

그 삶이 고단하고 신산했기 때문이다.

현재 10여 명의 아지매가 살고 있는 대평동의 모습만 봐도 그 풍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해안을 따라 들어선 수리조선공장들 뒤편으로 따닥따닥 붙은 10평 남짓한 낡은 집들, 그 위로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풀풀 날리는 쇳가루와

페인트 가루….

지난 26일 오전, 본지 취재팀이 만나러 간  '왕고참 깡깡이 아지매'

원광자(76) 씨의 셋방은 공장들과 좀 떨어진 동네 구석에 있었다.

전기세를 아끼느라 잘 때만 전기장판을 쓴다는 원 씨의 방은 찬물을 부은 듯 냉기가 흘렀다.

원 씨의 깡깡이 경력은 장장 46년.

1967년 배를 타던 남편, 세 남매와 함께 제주도에서 대평동으로 이사온 이듬해부터 시작한 깡깡이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깡깡이 일은 빌딩 유리창 청소부처럼 배 갑판에 묶은 밧줄에 매달려 공중에서 망치로 강판을 때려 달라붙은 패류와 녹을 제거하는 위험하고 힘든 '극한직업'이지만 임금은 박한 편이다.

 "요즘은 조금 나아졌지만 1960년대에는 일당이 600~900원에 불과했어요. 겨우 끼니를 거르지 않을 정도였죠."

남편이 10년간 병을 앓다 25년 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원 씨가 가장 노릇을 했다.

어렵게 살다보니 자식들 교육도 고등학교까지 밖에 못시켰다.

그래도 원 씨의 낯빛은 결코 어둡지 않다.

"일하는 것도 옛날처럼 위험하진 않아요."

 

공중에 매달린 상태가 아니라 지게차 위에 발판을 얹어놓고 일하기 때문이란다.

 작업도구도 이젠 망치 대신 연삭기(그라인더)를 쓴다.

원 씨의 영도다리 예찬론은 간단명료하다.

"아무리 부자라도 다리 없으면 못 삽니다. 어떻게 육지로 왕래하겠어요. 영도다리는 영도사람들의

목숨줄입니다."

원 씨는 지난해 11월 27일 영도다리가 47년 만에 다시 들어 올려질 때 감격했단다.

"한때 없앤다던 영도다리가 다시 끄덕 들리다니 세월이 좋아졌어요. 우리 깡깡이 아지매들 살림살이도

좀 나아지겠죠."

원 씨는 다시 들린 영도다리에서 희망을 보고 있었다.


■  대 이은 영도다리 지킴이

영도다리와 인접한 자갈치시장통에는 대를 이어 장사를 하고 있는 상인이 적지 않다.

약초재를 파는 '신덕상회' 주인 이윤애(58) 씨도 그중 한명.

이 씨는 14년 전 시어머니인 배월선(94) 할머니 밑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해 지난해 9월 완전히 가게를 물려

받았다.

이 씨의 시어머니는 1960년대 후반부터 '할매집'이란 상호로 약초재상을 했다.

고부가 약초재에 바친 세월이 근 50년이다.

"연세가 아흔넷이지만 아직도 건강하세요. 가게를 물려주시기 전까지 매일 일을 하셨고 요즘도 이따금씩 가게에 나오십니다."

이 씨의 말에서 시어머니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묻어났다.

지금 자갈치시장통에는 이 씨 가게를 비롯해 32곳의 약초재상이 있다.

점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은 상인도 많다.

신덕상회 인근에서 건어물을 파는 '청정상회' 주인 정지채(72) 씨는 20살 때 점원 생활을 시작했다.

5년 후 독립했다가 5년만에 망해 다시 점원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다 10년만에 재기해 차린 가게가 32년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현재 자갈치시장에 150여 곳의 건어물상이 있는데 대다수 가게의 주인이 나처럼 종업원으로 시작해 자기 점포를 마련했습니다. 영도다리를 끼고 건어물과 함께 반세기를 살아온 사람들이죠."

이곳 상인들은 요즘 신바람이 났다.

영도다리가 다시 들린 뒤 방문객이 몰려들면서 손님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시적인 특수로 끝나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하다.

다리 드는 게 두 번 이상 볼 만한 매력은 없는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어서다.

"다리 드는 것 외에 다른 볼거리가 필요해요. 방문객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영도다리와 함께 영원히 번성하고 싶은 상인들의 바람이다.


■  "점바치 아들이 사람 살렸다"

상가와 달리 인근 해안에 자리잡은 점집들의 분위기는 한산하다 못해 썰렁하다.

6·25 피란시절 50곳이 넘는 점집들이 성업했던 이곳에는 현재 단 3곳만 남았다.

'장미화 점집'이란 간판을 내걸고 28년째 육효점을 치고 있는 김순덕(80) 할머니는 그래서 우울하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됐는데 요즘은 손님이 통 없어. 하루 종일 있어도 한 명도 못 받는

날이 많아."

할머니는 앞을 못 보는 데다 손님까지 뚝 끊기니 더 고달프다고 했다.

할머니의 삶은 기구했다.

4살 때 시력을 잃었고, 20세에 결혼했지만 이듬해 남편과 사별했다.

먹고 살기 위해 배운 게 육효점이었다.


할머니는 하소연 끝에 재미난 얘기를 들려줬다.

"용하다고 이름난 점바치 김용진(2009년 작고, 당시 86) 할배한테 김영석이란 아들이 있었어.

김영석이가 영도다리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죽으려던 사람을 7명이나 구했어. 점바치가 아니라 점바치 아들이 사람을 살린 셈이지. 한데, 영도구청과 영도경찰서에 표창장을 주라고 요청하니 김영석이가 술주정뱅이라고

안 된다는 거야. 참 대단했는데…."

할머니는 부산시가 최근 발표한 '점바치 골목 복원계획'에 기대를 걸고 있다.

"복원돼 손님이 늘어나 죽을 때까지 여기서 벌어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어."


#  가슴속 한을 품은 투신자가 늘었고 이들을 무조건 살리는 게 우리의 사명이었다

■ '자살방지특공대' 김말봉 씨

   

1953년 휴전 이후 절망과 혼돈은 계속됐다.

배고픔은 어떻게든 견뎠다.

문제는 가슴 속 응어리였다.

이별과 그리움, 막막한 미래 등으로 속앓이하던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영도다리에서 투신이 잇따랐다.

'죽음의 다리'란 오명을 쓸 정도였다.

급기야 자살을 막는 경찰관까지 배치됐다.

본지 1962년 1월 7일 자 신문'투신자살자가 박 경사와 옥신각신'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부산 영도경찰서 해상계 박을룡 경사가 취직 못한 것을 비관해 영도다리에서 투신자살하려던 20대 남자를 구해낸 뒤 여비까지 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는 내용이었다.

박 경사는 '영도다리 자살방지 경찰관'으로 10년간 근무하면서 248명의 자살시도자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경사는 이런 공로로 특진까지 했어요. 175㎝가 넘는 키로 훤칠했고, 남자다우면서도 소탈했지요."

당시 박 경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가 있다.

김말봉(75·사진) 씨다.

수영 특채로 경찰에 입문한 그는 박 경사의 뒤를 이어 1966년 말부터 4년가량 '영도다리 자살방지초소'에서

일했다.

어두워지면 긴장했고, 날이 밝으면 초소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사명감으로 열악한 여건을 견뎌냈다.

   
본지 1962년 1월 7일 자 신문에 실린 박을룡 경사의 투신시도자 구조 기사.

1970년 1월, 김 씨는 대낮에 투신하려는 30대 여성을 발견하곤 급히

달려가 겨우 말렸다.

그는

"당시 이 여성처럼 생활고 등 처지를 비관한 투신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다시 생각해보라는 뜻에서 다리에 '잠깐만'이라는 푯말이 붙었다.

그러나 푯말은 떼어내지기 일쑤였다.

'기분 나쁘다'는 주민들의 항의 표시였다.

자살이 줄어들고 관광객에게 나쁜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초소는 1978년 철거됐다.

자살방지 경찰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부산·경남경찰청과 경우회(퇴직경찰관 모임)를 통해 박 경사의 행적을

수소문했지만 주소지와 연락처는커녕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1949년 공직에 몸 담았던 박 경사는 1969년 10월 통영경찰서(당시 충무서)에서 퇴직했다.

1914년생으로 살아있다면 상수(上壽·100세)다.


# 꿈에서도 배를 몬다, 몸이 빨리 나아 죽기 전에 도선 조타기를 꼭 다시 잡고 싶다

■ 도선 선장 백무술 씨

   

백무술(84·사진) 할아버지는 '바다 사나이'.

1963년부터 28년간 어선 등을 몰았고, 2002~2005년에는 도선(나루와 나루를 오가는 배)을 운항했다.

매일 동트기 전부터 해질 무렵까지 쉴 새 없이 부산 중구 자갈치 시장과 영도구 대평동을 왕복했다.

그러나 3년 전부터 앉은뱅이 신세다.

무릎 관절염이 악화돼 엉덩이와 허리까지 쓸 수 없게 됐다.

"꿈에서도 배를 몬다. 몸이 빨리 나아 죽기 전에 도선 조타기를 꼭 다시 잡아보고 싶다."

그는 도선 운항 재개를 간절히 바랐다.

영도구 대평동 주민과 관광객들도 같은 심정이다.


이들의 바람은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부산시와 (주)테즈락크루즈가 최근 도선 운항 재개를 적극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즈락크루즈 조정제 사장은 "적자 노선이지만 영도다리 관광 진흥 측면에서 최대한 협조하고 싶다"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편도 요금은 2000원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도선을 운항하려면 자갈치시장 쪽에 접안시설 설치와 다른 대중교통수단과 호환되는

교통카드 단말기 등이 필요하다.

 

테즈락크루즈는 현재 이런 선결과제들을 시와 협의하고 있다.

대평동 주민들은 이 같은 소식을 크게 반겼다.

대평동 18통 김동진 통장은

"도선 운항이 재개되면 다시 들린 영도다리와 함께 부산의 관광명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영도 도선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1876년 목선으로 운항을 시작했다.

당시 노선은 대교동~용미산,   대평동~자갈치 두개였다.

1934년 영도다리가 개통되면서 대평동~자갈치 노선만 남았다가

2007년 말 자갈치 공유수면 매립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마저 폐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