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경제…[고전에 길을 묻다[ <3> 제민의 도리 ①

금산금산 2014. 2. 5. 20:36

 

경제…[고전에 길을 묻다] <3> 제민의 도리 ①

濟民(제민)이란 민생을 돌보는 것, 요즘 정치엔 없는 것

 

공자(孔子, 서기전 551~서기전 479). 노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오늘날의 산둥성 취푸(曲阜)에서 태어났다.

 

 

-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몸을 닦고 집안을 평온히 한뒤
-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 보다는
- 천하를 평온하게 하기 위해서
- '수신'하고 '제가' 한다는 의미

- 경제의 본래말인 '경세제민'
- 백성을 풍요롭게 하기위해
-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
- 민생 외치는 정치가들
- 正心이 없으니 국민 힘든 것



창고 안이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 ― '관자' '목민' 편


공자가 위 나라에 갈 때 염유(有, 서기전 522~서기전 489)가 수레를 몰았다.

공자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많구나"라고 하였다.

염유가 묻기를, "이미 백성이 많으면 또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부유하게 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염유가 묻기를, "이미 부유해지면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가르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논어(論語)'의 '자로(子路)'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누구나 알듯이 공자는 배움을 그토록 좋아한 분이다.

스스로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배우지 않으면 도리를 알 수 없다거나, 배우지 않으면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등 공자의 말씀 가운데는 배움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그래서 공자에게 군자의 의무는 스스로 배우는 데에만 있지 않고 마땅히 백성들을 올바로 가르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열국을 주유하면서도 공자가 관직에 나가지 못한 이유도 백성을 통치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들을 가르쳐 스스로 도리를

실천하게 하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공자가 백성들을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성현의 마음은 참으로 깊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다르다는 훈민정음의 말씀처럼 한자는 우리말과 달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유가의 사서 가운데 하나인 '대학(大學)'에는 무릇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이는 먼저 나라를 잘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려 하는 자는 집안을 평온히 하고, 집안을 평온히 하려는 이는 먼저 제 몸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수신을 먼저 하고 제가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일이 많지만, 거꾸로 수신을 하는 이유는 제가를 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수신을 하는 이유는 제가를 하기 위해서이고, 제가를 하는 이유는 치국을 하기 위해서이며, 치국을 하는 이유는 천하를 평온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앞의 해석은 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제가를 하겠다고 나서지 말고, 제가도 제대로 못하면서 치국을 하겠다고 나서지 말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뒤의 해석에 따르면 제가를 하지 않으려면 수신은 왜 하며, 치국을 하지 않으려면 제가는 왜 하느냐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염유(冉有, 서기전 522~서기전 489). 이름은 구(求)이고 자는 자유(子有)이다. 공문십철 가운데 특히 덕행에 뛰어난 인물로 불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문의 뜻풀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역시 경세제민

때문이다.

우리가 쓰는 경제라는 말의 어원을 찾아보면, 사전에는 경세제민(經世濟民) 또는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줄인 말이라고 나온다.

간단히 해석하면 경세란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며, 제민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고전에서 제민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삼경의 하나인 '서경(書經)'이라는 견해가 보통이다.

'서경'의 '무성(武成)' 편에는 '惟爾有神 尙克相予 以濟兆民 無作神羞'라는 구절이 있다. 해석하자면 '신들은 나를 도와서 백성들을 구제하여 신으로서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는 뜻이다.

이후로 중국의 여러 경서들에서는 경세제민과 경국제민, 경방제민 등 유사한 의미의 말들이 여럿 나타난다.


경세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 제민을 먼저 이야기하는 이유가 의아한 분도 있겠지만, 그 이유는 이제 곧 나온다.

그대로 해석하면 경세제민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백성을 구제하는 일은 어떤 관계인가 궁금하다.

여기서 새겨 보아야 할 것이 바로 경세와 제민의 관계이다.

경세제민이란 두 가지 일이 따로 있거나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세상을 다스린다는 일의 요체가 바로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는

뜻이며, 좀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백성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왜 세상을 다스리려

하느냐는 뜻이다.

이처럼 동양의 경세제민 사상에는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고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 임금의, 요즘의 언어로 표현하면 국가의 최소한의 의무라는 윤리적인 측면이 담겨 있다.

유가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구체적인 실천방안도 여기에 있고,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가리키는 왕도사상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정치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아마 '민생'일 것이다.

민생을 말하지 않는 정치인이 없고 민생을 외치지 않는 정당이 없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 경제는 어렵다 못해 임종을 앞둔 중환자처럼 무기력하다.

민생을 돌보아 국민들이 생업을 걱정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제민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에서 도대체 제민의 길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캄캄해서 찾을 길이 없다.

민생을 외치는 정치인들의 마음에 터럭 하나만큼의 진심이라도 담겨 있다면, 어찌 경제가 이토록 위태로울까?

어떤 정치인들은 민생을 위하여 정쟁을 중단하자는 교묘한 말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정쟁의 일들이 우리 국민들의 민생을 어렵게 만드는 줄은 왜 모를까?

요즘 몇몇 권력기관이나 정보기관의 행태를 보면 국민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그저 우습게 아는 방자함이 하늘을 찌른다.

입으로는 민생을 떠들지만 그 안에 진정으로 국민을 공경하고 나아가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니 경제가 어려운 것이다. '대학'의 원문에는 '수신제가' 앞에 '격물치지성의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이라는 말이 나온다.

워낙 심오한 말씀이라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간단히 풀어 보자면, '수신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그 뜻을 성실히 하고 그 마음을 올바로 하라'는 뜻이다.

성의가 없고 정심이 없는데 어찌 제민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이야기다.



# 80명 미희에 '밀린' 공자, 열국의 제후들을 찾아가 仁의 정치를 호소하다

■ 공자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명 나라 시대에 공자의 일생을 그린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 가운데 '인번거로(因膰去魯)'. 제삿고기 때문에 노 나라를 떠난다는 뜻이다. 애공의 선왕인 정공은 무희에 빠져 정사를 태만히 하였다.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에 관례에 따라 사대부들에게 주던 제사 지낸 고기를 나눠주지 않았고, 공자는 이에 책임을 지고 사직한 뒤 열국을 주유하기 시작하였다.

유가의 '유(儒)'는 요즘은 선비를 뜻하는 말로 읽지만, 원래는 노 나라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직책의 이름이었다.

당시의 선비공자는 서른일곱에서 쉰한 살까지 바로 이 직책을 담당했다.

유가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흔히 공자가 자신의 뜻을 펼치려 일생 동안 열국을 주유했다고 알지만, 그 일은

실은 공자 나이 쉰다섯의 일이다.

물론 쉰다섯에 뜻을 펼치러 세상을 주유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터이다.

마치 톨스토이가 여든이 넘어 집을 나가 구도의 길을 찾아 떠난 일을 떠올리게 한다.


공자는 쉰한 살에 드디어 정공(定公, 서기전 509~서기전 495)의 부름을 받아

정식으로 벼슬에 나간다.

공자가 출사한 동안 노 나라의 정치는 크게 안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 나라가 클 것을 경계한 제 나라에서 80명의 미희를 보내자, 정공과 당시 노 나라의 실력자인 계환자(季桓子, ?~서기전 492)는 정사를 소홀히 하였다.

이에 공자는 쉰다섯의 나이에 고국을 떠나 열국을 주유하다가 예순여덟이 되어서야 다시 노 나라로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험한 일을 겪기도 여러 번이고, 심지어 목숨의 위협도 받는다.

   

하지만 공자의 여정에 빈곤과 역경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때 이미 공자는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 제후들은 공자를 후히 대접하였다.

또 공자의 제자 중에는 재아나 자로(子路, 서기전 543~서기전 480)처럼 높은 벼슬을 한 이도 많았고, 자공 같은 큰 부자도 있었다.

다만 공자가 원한 것은 자신의 뜻을 현실에서 펼쳐 보는 것이었으나, 제후들은 그를 중용하려 하지 않았다.

노 나라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자는 애공(哀公, ?~서기전 468)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으나 끝내 원하던 벼슬은 하지 못하였다.

백성들을 교화시켜 스스로 인(仁)을 이루게 하고자 한 공자의 뜻이 너무 커서, 현실 정치가들로서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준현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