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경제…[고전에 길을 묻다] <2> 사마천의 '사기'와 '국부론' ②

금산금산 2014. 1. 29. 11:51

 

경제…[고전에 길을 묻다] <2> 사마천의 '사기'와 '국부론' ②

국가가 상인으로 나서 소금과 철을 전매하고

독점적 이익을 취함은 자연의 道를 거스르는 것

 

 

최선의 방법은 백성의 심성을 존중하는 것이고, 차선책은 이익으로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백성을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다.
강제로 백성을 규제하는 것은 이보다도 못하고, 백성과 다투는 것은 최하책이다. ―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


사마천의 '사기'에서 경제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평준서(平準書)''화식열전(貨殖列傳)'에 나온다.

'사기'의 내용 대부분이 군왕과 제후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는데, '화식열전'에서는 특이하게 상인과 부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월 나라 구천의 재상이었다가 상인이 된 범여(范蠡, ?~?)나 공자의 제자로서 거부였던 자공(子貢, 서기전 520~서기전 456)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화식(貨殖)'이란 말 그대로 돈 또는 재화를 늘인다는 뜻이다.

사마천 시대의 경제정책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중농억상이 기본이었다.

사마천 자신도 "천하가 안정되면 농업을 본(本)으로 하고 상업을 말(末)로 하지만, 천하가 혼란되면

그 반대로 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화식열전'에서 사마천은 상인들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다만 사마천은 누가 얼마나 재산을 모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재산을 모았는가를 중시하였다.

다시 말해 사마천이 그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도 그들이 모은 부와 재산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들이 실천한 도리와 또 그 부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베풀 줄 알았던 도리 때문이다.

사마천을 애덤 스미스와 비교하는 것도 바로 이 화식의 도리가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물론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이 사마천상업보다는 생산을 더 중시하였다.

가령 "곡식 가격이 너무 비싸면 도시 주민들이 고통 받고, 곡식 가격이 너무 싸면 농민이 고통 받는다.

따라서 양곡 가격이 안정되려면 무엇보다도 양곡이 안정적으로 생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렇다.

사마천은 곡물의 가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공업이 그다지 발전하지 못하여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농업이든 공업이든 생산이 늘면 국가도 부유해지고 백성들도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화폐의 증발은 물가를 올릴 뿐이고, 독점은 국민들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사마천은 '국부론'의 가장 중요한 주장 즉 상업과 화폐가 아니라 노동과 생산이 국부의 원천이라는 원리를

이미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마천의 고향인 산시(陝西) 성 한청(漢城) 시에 있는 사마천의 동상.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하게 된 데에는 경제이론을 체계화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는 바로 그 당시에 유행하던 중상주의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스미스가 살았던 시대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이행하는 과정

있었고, 이 시대의 국가 형태를 흔히 절대주의 또는 절대왕정이라고

부른다.

중상주의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지만, 간단히 절대주의 국가의 경제정책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여러 경제사상 및 이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중상주의 정책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바로 상업과 화폐를 중시하고 독점과 특권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사상은 흔히 자유방임주의로 불린다.

그렇다고 스미스가 국가의 역할을 전혀 부정하거나 국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잘못된 경제정책들, 특히 자유경쟁을 억제하고 독점을 보호하는

정책들을 비판함으로써 바람직한 정책방향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

스미스의 진정한 의도이다.


'국부론'처럼 '사기'의 '평준서'는 한 나라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이 주요한 내용이다.

'평준'이란 한나라에서 국가의 전곡 즉 돈과 곡식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직명이기도 하고, 무제가 국가재정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시행한 법의 이름이기도 하다.

물건 값이 쌀 때 국가가 사들여 저장해 두었다가 가격이 오르면 내다팔아 그 차액을 국가의 수입으로 하는 것이다. 지방의 산물을 정부가 조세로 징수하여 다른 지방에 팔아 이익을 도모하는 균수법(均輸法)과 함께 시행되었기에 둘을 합하여 평준균수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 나라의 법은 지나치게 복잡하였고 세금은 무거웠다.

그래서 고조 이후 한 나라의 황제들은 법을 간소화하고 세금을 경감시키는 정책을 실시해 왔다.

세 가지만 남기고 모든 법을 폐지시킨 '약법삼장(約法三章)'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사기집해'의 한 부분. '사기'의 주석도 여러 시대에 걸쳐 저술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당 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30권)'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30권)' 그리고 송 나라 때 배인(裴)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 80권)이다. 이 세 학자의 주석을 합쳐 삼가주본(三家注本)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제는 흉노와의 오랜 전쟁을 비롯하여 지나친 대외팽창정책으로 국가의 재정을 고갈시켰다. 그래서 균수평준법이 나온 것이다.

평준균수법은 많이 생산되어 값이 싼 산물을 국가가 매입하여 가격의

폭락을 막고 그 물자를 다른 지방에 운송하여 판매함으로써 물자 유통을 원활히 함으로써 물가를 안정시켜 서민의 생활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가가 상인의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중간 이익을 얻어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다.

때문에 상인들은 크게 불만을 가졌다.

물건 값이 비싸지니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무제의 경제정책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콜베르를 재무장관에 기용하여 적극적인 중상주의 정책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한 것과 비교될 만하다.

콜베르처럼 무제도 소금과 철 등에 대한 전매 즉 독점을 이용해 국가재정을 확충하였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염철(鹽鐵)의 전매제도는 군현이나 제후국들에게 막심한 불편을 끼치고, 값은 비싼 반면에 품질은 조악한 철기를 백성들에게 강매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사마천에게는 무제의 경제정책이 자연의 도와 백성들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로 보였던 것이다.


# 원칙을 지킨 소무와 실리를 내다본 이릉

- 흉노에 투항해 살아남은 이릉은 이렇게 말했다
- '헛되이 죽음은 때를 보아 절개를 세움만 못하다'

   
소무와 이릉의 작별을 그린 '소무별이릉(蘇武別李陵)'. 명말 청초의 화가 진홍수(陳洪綬, 1599~1652)의 그림.

진시황이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건설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다.

대대로 중국의 왕조에서는 오랑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흉노의 침입이 큰 골치였다.

때로는 화친정책을 쓰기도 하였고 때로는 토벌정책을 쓰기도 했지만

흉노의 침입은 그치지 않았다.

한 무제는 흉노에 강경한 군사정책을 사용하였다.

사마천이 궁형을 받게 된 이유는 흉노를 정벌하러 갔다가 포위되어

군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투항하한 이릉 장군을 변호한 일 때문이다.

 

이릉은 군사 5000으로 흉노의 배후를 공격하였다가 오히려 흉노에게 포위되고 만다.

이릉은 8일간이나 싸웠지만 무기도 떨어지고 구원병도 오지 않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참모의 간언에 따라 남은 군사들을 살리기 위하여 항복하였다.

포로가 된 이릉은 흉노의 임금인 선우의 신임을 받아 장수가 되었다.

이에 화난 무제는 이릉의 가족들을 몰살시켜 버렸고, 이제 이릉은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소무(蘇武, 서기전 140~서기전 80)는 이릉이 흉노에 있을 때 사신으로 왔다가 억류되어

19년이나 고초를 겪으면서도 절개를 지켰다.

소무가 한 나라로 돌아올 때 두 사람은 서로 작별하면서 시를 주고받았는데 이를 '소리지시(蘇李之詩)'라 한다.

이 시에서 이릉은 '虛死不如立節'헛되이 죽음은 때를 보아 절개를 세움만 못하다는 말로

자신이 항복한 이유를 해명하였다.

어쩌면 구차한 자기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왜 사마천이 굳이 그를 변호했을까?

사마천은 이릉의 인품을 믿었기에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이다.

사마천 또한 헛되이 죽기보다는 때를 기다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성하지 않았는가.

언제 우리 정치가 시끄럽지 않은 적이 있었느냐마는 요즘은 터지는 사건들의 수준이 참으로 저급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문제들이 모두 정치가들의 소통 부재 때문이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원칙을 지키고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는 일도 좋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를 굽힘으로써 더 큰 대의를 이룰 수 있다면, 그 편이 더 옳은 일일 수도 있지 않은가.

조준현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