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델타시티에 부산 미래 건다 <1-5> [낙동강 삼각주 이야기[- 살아 있는 '생활사 박물관'
'물 위의 집' 짓고 고기잡이, 채소 실은 통통배 시장으로 내달려
부산 강서구 신노전 앞 평강의 좁은 물목을 오르내리던 통통배. 강기슭이 얕아서 뱃머리에는 항상 삿대를 든 사공이 서 있어야 했다. 강변의 갈대밭이 무성하다. |
- 강가 지천으로 자란 갈대로
- 발·갈꽃빗자루 만들어 판매
- 채소밭 일구고 게 잡으며
- 조그만 하중도서 따뜻한 삶
- 이들 대부분 이젠 고인으로
- 녹산동 수참·조만강 범방대…
- 삶의 기억들 존치시켜야
1959년 겨울, 필자는 결혼하는 고향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강동동 제도리 천자도(이하 지명은 현재의 부산 강서구)에 갔었다.
조그마한 하중도(河中島, 삼각주)들이 물 위에 떠 있고 그 섬 중 한 곳의
신부집을 찾아, 녹산에서 나룻배로 건너고 다시 삿대를 이용해 섬 사이를 비집고 가야 했었다.
가지런한 갈대 울안에 정갈하게 지은 갈대집은 당시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토방에서 융숭한 우인 대접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술이 도도하게 오른 친구가 힘자랑한다고 삿대를 강바닥에
힘껏 찍어 배를 밀어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미처 삿대에서 손을 떼지 못해 그만 차가운 강물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신부집은 비록 강 한가운데의 오지에서 살면서도 주위 섬들에다 채소밭 일구고 갈대숲에서 갈게 잡아 풍족하진 않지만 따뜻한 삶을 살았다.
이제는 이 섬들이 서로 이어져 자동차로 오가는 보통 마을이 됐다.
■ 강안에 녹아 있는 삶
그동안 낙동강 역사를 찾아 하중도를 걸어서 답사하며 만난 어른들(이제는 대부분 고인이 됐다)도
"섬으로 시집와서 섬 밖으로 나가 본 일이 없다"며 "구차하게 살던 지난날들이 지긋지긋하다"면서도
향수(?)에 젖는 모습을 보았다.
강가에는 거룻배와 돛단배를 건조하고 수리하는 조선소가 있었고 낙동강으로 먹고사는 어부들이 많았다.
구포 어촌계 박남용(64) 씨는 아예 서낙동강 물가에 '물 위의 집'을 짓고 살면서 낙동강 어부가 돼 물밑을 꿰고
산다.
서낙동강은 일본강점기 고질적인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동)낙동강 양안에 일천식(一川式) 높은 제방을 쌓고
서쪽으로 휘어진 본래의 낙동강 물길에 수문(대동·녹산수문)을 설치, (서)낙동강 물을 가두어 농업용수로 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수문을 두기 이전 서낙동강은 퇴적평야에서 생산되는 각종 채소의 남해안 보급로였다.
밤늦게까지 수확해 다듬은 채소를 실은 통통배들이 물길을 따라 형산진 녹산장으로 멀리 부산장으로 내달렸다.
■ 사라진 갈대밭 서정
1970년대 강서구 녹산의 갈새집. 갈대와 억새를 섞어 지붕을 인 집이다. 주경업 부산민학회장 제공 |
조선 후기 문인으로 남인의 촉망을 받던 청년학사 이학규가 신유곡사에서 천주교인으로 몰려 유배 생활한 곳이 김해여서, 유배 온 사람답지
않은 여유로움으로 낙동강 하류 일대를 유람하면서 강 사람들의 삶을
노래했다.
'갈대꽃 포구에 날이 어지러울 때/ 밤낮으로 시끄럽게 물새떼 꾸룩 꾸르르/ 서리 내려 벌레 울음 들려 즐거우니/ 모두 통발 보자기 들고 강변에 가네'.
흐르는 낙동강 물도 강변의 초가들도 숨소리를 죽였는데 갈대꽃이 물 위에 뜬 달을 희롱하는 포구의 정경이 그려지고 달밤에 통발 들고
게 잡으러 나가는 어촌의 여유로움을 그려내고 있다.
강가에 지천으로 자란 갈대는 이곳 사람들의 생활 원천이었다.
발을 짜서 만들고 삿자리, 삿갓, 갈꽃빗자루를 만들어 내다 팔았다.
갈대숲 사이로 갈게를 잡아 게장을 담그면 그 수입이 짭짤했다.
낙동강 하구는 갈대밭 천지였다.
수문설치 후 토사의 퇴적이 빠르게 진행돼 육지로 변하면서 고깃배 불도, 갈대숲도, 게잡이꾼들도, 낚싯배도
사라졌지만...
가락 남쪽의 남포도 그렇게 사라졌다.
몇 년 전 김해시 화목동에서 만난, 이곳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왔다는 최정자(당시 51) 씨는 "지금도 논바닥을 조금만 파 내려가면 갈대 뿌리가 지천으로 나온다"고 했다.
여기 사람들은 "전봇대를 논바닥에 거꾸로 꽂아두면 전봇대가 박혀서 사라져 버린다"는 우스갯소리를 예사로이 한다.
고려 원종 15년(1274년) 일본 원정길에 오르는 여몽연합군이 900여 척의 군선과 2만여 군대를 집결시킨
김해 앞바다가 서낙동강 남포 이곳이었을 터인데, 갈대밭 포구는 뭍으로 변해 논바닥이 되었고 넓고
큰 갈대숲도 사라져 버렸다.
조선 후기 김해군수를 역임한 김건수의 '남포어화(南浦漁火)'에나 남아 있을 뿐이다.
'냇가의 촌 늙은이 두어 칸 어부들 집/ 온종일 안개 낀 강변에 돌아가기 잊었네/ 밤이 오래도록 초승달 뜰 줄 몰라/ 관솔불 켜 들고 갈잎게 털러 가네'.
■ 역사를 간직한 포구
에코델타 시티를 계획하고 있는 서낙동강과 맥도강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평강천은 곳곳에 샛강을 둬
하중도를 흡족하게 적시고, 포구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삼포를 개항하기 전 녹산동 미음리 구랑촌에 뒀던 수참(水站)은 일본과의 무역거래가 이뤄졌던 곳으로
한·일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해 흥청거렸다.
가락동 죽림리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죽도성이 100m가량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서낙동강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물목 녹산 성산동에 있었던 형산진은 명지로 부산으로 오가는 나룻배
길이었다.
명지동 순아2구 평강천에서 샛강으로 흘러 서낙동강과 만나는 들머리 마을에 있었던 남대포는
서낙동강 최남단 성산(녹산)과 마주 보는 당시 김해 가락면 제도리의 큰 포구였다.
조만포는 남해고속도로의 가락IC 남쪽 조만강 하구, 서낙동강을 낀 포구다.
옛 이름이 태야강인 조만강은 김해 주촌에서 발원해 해반천과 호계천, 금천을 만난 후 둔치도의 서쪽으로
돌아 생곡동 장락포를 지나서 서낙동강으로 흐른다.
남해가 만조일 때 바닷물이 이곳까지 올라왔었다고 조만포다.
조만강의 범방대는 그 옛날 죽암 허경윤, 좌랑 도처형 등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 시회를 열었던 곳이며, 죽림리에는 외침을 막기 위해 김해부사 이상경이 대변청과 화약고를 설치하고 전함을 배치했는데, 후에는 세곡 수납을 위한 해창(海倉)을 뒀던 곳이었기에 주요 군항으로 일반 백성의 접근을 금한 곳이기도 하다.
강바람에 펄렁이는 서낙동강 물결이 비단을 펼쳐 놓은 것같이 아름답게 보였다는 금파대도 해창 북쪽
오봉산 기슭(고정마을)에 있었다.
에코델타시티 계획을 입안하면서 이렇듯 여기 살던 사람들의 삶을 외면할 수 없다.
서낙동강안에 사는 이들 특별한 삶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기억할 수 있게 존치하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서낙동강 생활사 박물관'이다.
서낙동강 자연생활사 자료관이든, 서낙동강 사람들 이야기 자료관이든 심도 있게 기획하는 일을
우선으로 꼽아야 한다.
# 현대문학 속의 낙동강
-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 강인수, 고디꾼의 삶 그려
낙동강 시인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던 박현서는 연작 낙동강 시편을 44편이나 써 놓고
살아생전 그토록 그리워했던 '푸른 물빛'을 가슴속의 기억으로만 품은 채 강물처럼 흘러가 버렸다.
'한때는 우리 모두/ 푸른 하늘도 들여 앉히고/ 한때는 우리 모두/ 푸른 강물도 들여 앉혔지/ 이제 더러는 이 시대와 세찬 물굽이를 거슬러 … 안아 들여도/ 마셔 보아도/ 내 안에 머물지 않고/ 흘러만 가는 내/ 푸른 물빛이여'. (낙동강 37 '푸른 물빛의 기억' 중)
어디 그뿐이랴. 부산의 소설가 김정한은 낙동강 변에 깔린 민중의 이야기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모래톱 이야기' '뒷기미나루' '산서동 뒷이야기' 등이 낙동강이 무대이자 주인공이었다.
늘 가난한 이웃 이야기를 글로 써온 작은 거인 정동수는 자서전적 격인 '평강리 1·2·3' 속에 어린 시절 가난을
평강과 함께 엮어내고 있다.
강인수의 장편소설 '낙동강'은 고디꾼들 이야기다.
소금배를 탄 고디꾼들의 삶을 그리면서, 겨울철 얼어붙은 강바닥 얼음을 삽질로 깨어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물길 틔우는 작업을 하다가 끝내 죽어간 17살 고디꾼의 이야기는 차라리 애달프기까지 하다.
고디꾼이란 바람이 약해졌거나 역풍이 불 때 돛단배에 고딧줄을 걸어 강변에서 잡아당겨
배를 움직이게 하는 뱃사람을 일컫는다.
도사공의 선창 소리에 줄꾼들이 '여기엿차 어기야' 소리를 한소리로 받으면서 당기며 힘도 모으고 고됨을 풀었다.
'이여이여차 이여이여차/ 이여차이여 이 카라가 이여차/ 잘못하면 이여차/ 부산 간다 이여차'.
이젠 고딧줄 소리를 아는 이도 없다.
명지의 옛 고디꾼은 구십을 넘은 나이로 옛이야기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찾아오마 약속드린 고디꾼도 그 사이 유명을 달리해 함안 조태호 고디꾼이 남긴 소릿말이 있을 뿐이다.
주경업 부산민학회장·향토사학자
※ 공동기획 :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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