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에코델타시티에 부산 미래 건다 <1-4> [낙동강 삼각주 이야기]- '1300리' 역사의 발자취

금산금산 2014. 2. 5. 20:53

 

에코델타시티에 부산 미래 건다 <1-4> [낙동강 삼각주 이야기]- '1300리' 역사의 발자취

수로왕의 로맨스, 이순신 장군 전승, 구포배 등 1700년 이야기 간직

 

 

1926년에 지어진 부산 강서구 대저동 일본식 가옥 전경. 지금은 '낙동강 칠백리'라는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지난해 부산시 근대건조물로 지정됐다. 오른쪽은 건물 내부 모습. 권혁범 기자

- 가야시대부터 삶의 터전
- 대저 일본식 과수원집
- 복원하면 훌륭한 관광자원
- 조성중인 에코델타시티
- 국적불명 명칭 부끄러워
- 인문·자연환경 담아내야

 


1700여 년 전 가야시대낙동강 하구수심 50~60m의 깊은 바다였다(현재 수심은 1m 내외).

 이 시기 상류 지역에서 떠내려온 흙과 모래가 쌓여 바다 밑에서 땅이 서서히 올라오는데 이 땅을 '등'이라고 부른다.

지금 부산 강서구 남단에는 전등·경등·사취등·용등·대마등·장자도(옥림등)·진우도(왜섬등)·맹금머리등 등이 분포해 있다. 또 새부리등·진우동생등이 새로 솟아오르고 있다.

 


낙동강(522㎞)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경상분지를 적시면서 영남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해 왔다.

이 살아 숨 쉬는 땅에 '에코+델타+시티'를 건설한다고 한다.

그러려면 이곳을 흐르던 샛강들을 잘 찾아 복원하는 게 우선이다.

이를 위해 낙동강 1300리 물길이 간직하고 있는 인문·자연환경을 담아내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다음 강변에 아름다운 건물들을 세워 베니스나 쌍트페테르부르그를 능가하는 명품 강변도시를 건설한다면 세계에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 농경의 시작

낙동강 삼각주는 조선시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4년)대저도·명호도 등 여러 하중도가 표기돼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 주민의 생활도 소개돼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전후로 일본인들은 낙동강 하구의 대저도 지역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당시 삼각주의 하천 부지는 지번과 지적이 없어 주인 없는 땅이나 다름없었다.

 1908년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대저를 중심으로 강변에 둑을 쌓아 홍수 피해를 임시로 막고 이 땅을 그들의 소유로 만들면서 일본인 농부들을 이주시켰다.

이곳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배수가 좋은 사질토에 배를 재배해 만주·일본 그리고 국내에 '구포배'라는 이름으로 수출·판매했다.

지금도 이곳에는 일본 사람들이 살던 집들이 많이 남아 있어 과수원집 후손들이 찾아오고 있다.

낙후돼 가는 일본식 가옥들을 복원·수리해 '일본거리'를 조성하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1900년대 전후로 낙동강하구에 등(연안사주)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16~1957년 기간 중 17회의 대홍수는 막대한 양의 토사를 운반해 연안사주(울타리섬) 지형의 형성을 도왔다.

한편 1988년 낙동강 하굿둑이 건설된 후 연안사주의 성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2010년 이후부터 다대포해수욕장 앞에도 새부리등이라는 모래섬이 생겨서 이곳 바다가 호수로 변하고 있다.


낙동강 삼각주에 농경이 본격화된 것은 일본의 자본과 기술로 1930년대 대저수문과 녹산방조수문 그리고 낙동강 변에 대규모 제방이 축조된 이후의 일이다.

 새로운 농경지가 생겨나자, 인근 산간 지역 주민이 삼각주로 대거 이주했다.

이주 당시에는 매년 큰 홍수로 갈대나 보리농사가 고작인 매우 고된 생활을 했고, 그때의 농민 중 생존자는

지금 90~100세가 됐다.

 


■ 국경을 넘은 로맨스

낙동강 삼각주는 고대 가야·조선의 역사와 문화가 간직돼 있다.

 김수로왕과 허 황후의 로맨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전승 역사의 고장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가락국기'에 기록된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김수로왕에게 시집오는 설화다.

 김해 바다 서남쪽에서 공주를 태운 붉은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며 오고 있었다. 공주(허 황후)를 마중 나간 왕의 신하가 먼저 망산도(용원 선창 부근) 위에 횃불을 올려 뱃길을 밝히니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렸다.

허 황후 일행이 타고 온 돌배는 지금도 망산도 앞바다에 남아 있다.

 


이순신 장군의 다대포 해전(1592년 9월 1일 낙동강 하구에서의 해전)도 삼각주에서 펼쳐졌다.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는 1592년 10월 5일 첫 닭이 울 때 가덕도를 출발, 심한 샛바람(동풍)이 부는 몰운대(다대포 해수욕장 끝)를 지났다.

이어 오전 8시께 화준구미(사하구 화손대 서쪽의 내만으로 추정됨)에서 왜적선 5척, 다대포에서 8척, 서평포에서 9척 그리고 절영도(영도)에서 2척 등이 모두 기슭에 줄지어 대어 있으므로 3도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가 합력하여 24척 모두를 남김없이 격파하는 대승리를 거뒀다.

 


■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위해

우리의 오랜 역사가 간직된 땅, 강서구 대저도 일대에 에코델타시티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의 이름이 '에코+델타+시티'라고 하는데, 이 지역은 가야의 맹주인 금관가야의 옛 터전이다.

 에코텔타시티라는 신도시 명칭이 국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잠시 유행의 물결을 탄 외국어 조합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오래 두고 불려야 할 이름인데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기우일까.


이 지역에는 우리 선조들이 남겨 놓은 많은 이야기가 있다.

 과거 이 땅의 내력과 주민 생활의 모습들을 문화유산으로 자랑할 수 있도록 천천히 찾고, 다듬고, 생각해야겠다. 특히 자연사 문화유산이 간직된 도시로 옛 자연과 샛강의 물길이 살아나고 생태환경이 공존하는 디자인을 만드는 여유가 필요하다.

역사와 문화가 없는 신대륙의 황무지에 기하학적 직선 위주의 도시를 만드는 일이나, '빨리 빨리'라는 조급한 사고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단순히 경제적 유익만을 위한 도시는 막아야 할 것이다.

 



# 수많은 하중도 사이 거미줄 같은 샛강 흘러 

■  삼각주의 내부 구조

- 퇴적층 두께 약 80m


   

영남의 어머니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에서 큰 발걸음을 시작,

 부산에 이르러 모래와 흙을 쌓아 놓았다. 


삼각주 서쪽으로는 서낙동강, 동편으로는 동낙동강의 두 갈래로 나뉘어 흐른다.

 이렇게 낙동강 유로에는 대저도·대사도·중사도·평위도·맥도·을숙도·일웅도·천자도·도도·동자도·송백도·죽도·작지도·순기도·서간도·유풍도·제도·명호도·순아도·수봉도·대부도·덕도·전양·사취등·경등·전등·신호도, 그 밖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하중도가 형성돼 있었다.

또 이 섬들을 비켜 지나는 거미줄 같은 샛강들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낙동강 하구는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로, 남해의 바닷물이 낙동강을 따라 삼량진·밀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전 옛날에는 이렇게 다대포에서 낙동강의 북쪽으로 깊숙하게 바다가 들어와 있었다.

이 해역을 김해만 또는 낙동포라고 부른다.

 


삼각주 평야가 자리 잡고 있는 부산 강서구 땅은 과거 바다로, 정몽주 선생은 김해에서 배를 타고 초선대를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경남 김해시청에서 남쪽으로 멀리 펼쳐진 넓은 강서구의 평야는 조선 초기까지 배를 타고 다니던 바다였다.

 


신생대 제4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네 차례의 빙하기가 있었다.

 빙하기에는 지구 기온이 낮아져 양극 지방이나 높은 산지가 거대한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이때의 바다는 지금보다 130~140m 정도 낮아서 육지의 면적이 훨씬 더 넓었다.

그런데 약 2만 년 전부터 기온이 온화해지면서 빙하가 녹고 바닷물이 점차 불어났다.

해수면이 오늘날과 같은 높이까지 올라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이다.


   

낙동강 삼각주의 퇴적층 두께는 약 80m, 남·북 간 길이는 30㎞, 동·서 폭은 6~16㎞다. 

이 넓고 깊은 바다에 얼마나 많은 양의 토사가 쌓여 오늘날의 대평원이 만들어졌을까.

 낙동강 삼각주의 지층 퇴적 단면을 살펴보면 바다가 올라오는 상승 경향이 일정치 않았음도

알 수 있다.


반용부 부산대 환경연구원 특별연구원·전 신라대 인문사회과학대학장

※ 공동기획 :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