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3> '호열자', 부산을 덮치다
개항과 함께 온 '콜레라', 창궐 진원지는 늘 부산…웃지못할 주술도 횡행
관부연락선 덕수환. 1929년 부산항에 입항한 덕수환에 호열자 의심 환자가 발생해 승객 전원이 검역소에 격리됐다. 부산박물관 제공 |
- 개항후 외국인들 붐빈 부산
- '전염병 수입지' 되며 유행
- 1919·1920년 영주동 등 창궐
- 매일 수십 명씩 사망자 나와
- 의심환자 발생 관부연락선
- 승객 전원이 격리 조치되고
- 오진으로 강제 입원 母子는
- 다른 병 치료 못받아 죽기도
- 쥐 귀신이 퍼트리는 병 생각
- 고양이 그림 문에 붙이는 등
- 역병 막으려는 민간의 주술
- 1963년 유행때에도 계속돼
■ 호열자, 콜레라의 다른 이름
부군당굿에서 호구거리하는 모습. 호구거리는 마마신(천연두)을 위한 의례이다. |
지금 부산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암일 것이다.
그러나 근대 시기까지 몸서리치게 무서운 병은 '역병'이었다.
호열자는 역병 중에서도 가장 무시무시한 병이었다.
전파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치사율도 높았다.
이 병에 걸리면 구토와 설사를 하고, 경련과 실신을 거듭하다가
죽어갔다.
호열자(虎列刺)는 '콜레라'를 한역한 것이다.
호열자는 '호역(虎疫)'이라고도 했다.
호랑이가 살점을 뜯어내는 고통을 준다는 뜻으로 호열자에 관한 공포
관념이 담겨있다.
호열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파되었을 때는 요괴스런 질병이란 의미로 '괴질'이라 불렀다.
조선에서는 19세기 들어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1858년에는 무려 50여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 호열자의 습격에 놀란 일제
1878년의 개항은 호열자가 해항도시 부산을 습격할 좋은 기회가 됐다.
콜레라는 대개 중국과 일본 등 외국에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1879년 부산에서 호열자가 유행해 한차례 홍역을 치렀다.
일제는 이를 명목으로 영도에 격리병원과 소독소를 설치했다.
당시 영도는 개항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제가 마음대로 토지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동래부사가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은 일제의 탄압이 광폭해진 해이며, 아울러 호열자의 습격이 거센 해였다.
전국적으로 1만6915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해 1만1084명이 죽었다.
이것은 공식적 통계이니 훨씬 많은 사망자가 있었을 것이다.
1920년에도 호열자는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해에는 2만4229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했다.
당시 부산은 콜레라 위험지역이었다.
조선인이 사는 중구 영주동과 동구 초량동 등지에서 호열자가 창궐했으며, 부산에서만 매일 수십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두 해에 걸쳐 연이은 호열자의 습격에 놀란 일제는 콜레라 검역과 방역 행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부터 콜레라 예방접종이 시행됐고, 전염병 예방을 위한 위생 강습도 시작됐다.
■ 관부연락선을 탄 콜레라
일제 강점기 부산은 '전염병의 수입지'였다.
부산에는 연락선을 타고 입출국하는 사람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늘 외항 선원들로 붐볐기 때문이다.
부산항에서 검역한다 해도 콜레라 환자가 유입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23년 7월에는 중국인 우백천이 부산에 왔는데 심한 토사를 하고 고통스러워했다.
증세가 콜레라로 의심되었으므로 곧바로 전염병 환자를 수용하는 순치(順治)병원에 격리했다.
가끔 연락선 안에서 호열자 환자가 발생했다.
1929년 8월에는 부산항에 입항한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에서 호열자로 의심되는 토사 환자가 나타났다.
승객 전원은 내리지 못하고 모두 신선대 검역소에 격리됐다.
환자의 검사 결과를 12시간 이후에 알 수 있으므로 집에 가지 못하고 무작정 대기했다.
1930년 9월에는 부산 수상경찰서에 엽기적인 통지가 왔다.
상하이를 거쳐 온 영국의 여객선 마루아 호가 호열자로 죽은 선원의 시체를 시모노세키 주변의
바다에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1급 전염병인 호열자 환자가 발생하면 이렇게 바다에 수장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부산의 경찰 당국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시모노세키는 물론 모지 등지에서 오는 모든 선박의 승선자에게 대변 검사를 실시했다.
■ 홍영식 한의원 습격 사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다.
호열자 의심환자들이 꼭 이 꼴이다.
엉뚱하게 호열자 환자로 몰려 격리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불행하게도 죽는 일도 있었다.
동구 수정동에 살았던 전원갑의 처 김복개(23)와 아들 도용(4)이 그런 사례이다.
1925년 9월 전원갑은 자신의 처가 신병이 낫지 않자 한의사 홍영식에게 데리고 갔다.
다른 의사들은 모두 폐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던 터였다.
하지만 홍영식은 그녀의 병을 호열자라고 진단하고, 관할 파출소에 고발했다.
급보를 들은 경찰서에서는 김복개와 도용을 끌고 가 순치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런데 순치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호열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경찰서의 명령 없이는 퇴원할 수 없다며 차일피일 끌다가 그만 김복개가 죽고 말았다.
도용도 퇴원 후 며칠 만에 죽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언론은 분노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시신 2구를 들어 메고 홍영식 한의원을 찾아가
큰 소동을 벌였다고 전한다.
■ 1946년 귀환동포의 호열자, 부산 덮치다
일제가 패망한 후 귀환동포들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귀환동포들이 반갑지 않은 것은 그놈의 콜레라 때문이었다.
1946년 5월 귀환동포 3150명을 싣고 중국에서 온 수송선이 일주일이 넘도록 부산에 입항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 안에 호열자가 창궐해 2명이 사망하자 이들을 수장했기 때문이다.
미 군정의 방역부에서 소독했지만 허사였다.
귀환선을 통해 들어와 부산을 덮친 콜레라는 전국으로 퍼졌다.
5만7000여 명의 콜레라 환자 가운데 3만6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정의 허술한 방역 정책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하였다.
미군은 시체를 영도 바닷가에 수장했는데, 이는 인근 마을로 호열자를 퍼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해 부산에서는 하룻밤에 80명씩이 호열자로 목숨을 잃었다.
흉흉해진 인심 탓에 부산에서는 별별 일이 다 있었다.
호열자 환자를 장롱에 감추다 한 동네가 몰살당했으며, 화장터에서 연기가 날아온다고
화장터를 부수는 소동도 있었다.
또 시신 운반을 거부하는 운전사에게 권총을 들이대기도 했다.
이 참혹한 폐허에서 영주동 주민들은 철저한 자기 격리로 호열자의 습격을 몰아냈다.
그들은 교대로 경계를 보다가 다른 동네 사람이 나타나면 무조건 몽둥이찜질을 했다고 한다.
■ 두려운 신이 된 콜레라
민간에서는 호열자를 막기 위한 주술의식이 유행했다.
대표적인 풍속이 고양이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왜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 그림일까?
호열자에 걸리게 하는 악귀를 쥐 귀신으로 여겼으므로 천적인 고양이 그림을 붙여 쫓고자 한 것이다.
부산과 콜레라의 악연은 현대까지 이어졌다.
1963년 대통령 선거를 20여 일 앞둔 9월 콜레라가 다시 부산을 덮친 것이다.
당시에도 주술 처방이 통용되었다고 한다.
호열자로 인한 사망자의 초상집에 조문 온 손님에게는 특효약이라며 소주와 마늘을 먹였다.
콜레라를 쫓기 위해 동네 어귀에 가시가 많은 아카시아 나무를 세우기도 했다.
기분 나쁜 소리로 콜레라를 쫓는다고 밤새 바가지로 마루를 긁는 주민도 있었다.
콜레라를 세균이 아니라 병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콜레라는 현대까지도 두려운 신으로 전해졌다.
# "부산서는 식사도 외출도 무섭다"
- 1920년 유행때 온 언론인 서춘
- 일본 가는 관부연락선 놓치고
- 여관방 박혀 "감옥 신세" 한탄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왕래했던 사람들은 콜레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활동했던 언론인 서춘(徐椿)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그는 조선유학생으로 2·8독립선언에 참여했지만, 곧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에 가기 위해 1920년 8월 5일 경부선을 타고 부산에 내려왔는데, 그 때는 마침
부산에 콜레라가 창궐했던 시기였다.
만원이 되어 관부연락선을 타지 못한 서춘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쩔 수 없이 일본인 여관에서 묵으면서 배를 기다려야 했다.
여관에서 주는 밥도 호열자가 있을까 먹기에 겁이 났다.
그는 원수 같았던 호열자를 '호군(虎軍)'이라 부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산에는 친한 이도 있고, 선생과 같이 존경하는 이도 있다. 부산에 호열자만 없더라도 내가 이 여관에서 혼자 지낼 사람이 아니다. 호군이 무서워 외출도 못하고 작은 방에서 혼자 쓸쓸히 지내고 있다. 꼭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서춘은 관부연락선을 타고 빨리 부산을 떠나길 원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처럼 관부연락선이 콜레라의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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