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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4> '부산 멸치'에 관한 명상-부산의 생선과 어업 이야기

금산금산 2014. 3. 15. 08:45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4> '부산 멸치'에 관한 명상-부산의 생선과 어업 이야기

'어데서 놀다 이제사 왔나' 흥겨운 멸치 후리는 소리 모래사장마다 울려 퍼져

 

 

부산시 무형문화재 7호인 다대포후리소리. 다대포 해변에서 멸치를 잡기 위해 후리질을 하며 부른 노동요에서 비롯됐다.



- 봄에 남해서 출발 북한 갔다
- 다시 내려오는 회유성 어종
- 부산 4~6월 성어기 맞으면
- 곳곳에서 멸치잡이 이뤄져

- 바다로 나가 그물 에워싸고
- 모래사장서 견인 전통어법
- 1960년 이전 다대포 등에서
- 노동요 부르면서 행해져

- 구한말 일본인들 어장 진출
- 현대식 어구인 권현망 사용
- 경남 해안가서 멸치 남획
- 분노한 의병에 살해되기도

 

 


■ 메르치, 하찮은 생선인가

"메르치 사이소!"

부산 중구 자갈치 건어물 시장에 가면 자주 듣던 소리다.

예전에는 아지매들이 멸치 바구니를 이고 마을에 직접 다니면서 팔았다.

멸치 없는 국물은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달려온 부산 아낙네들이 금방 동을 냈다.

이렇게 멸치는 음식생활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건만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일단 '멸치 같다'는 표현은 썩 좋은 말이 아니다.

없어 보이는 깡마른 체격이거나 힘 못 쓰는 약골 체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멸치 새끼 같이 쏙 빠진다'는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표현이다.

중요하지만 위험스런 일에 책임을 안 지고 잘 빠져나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 멸치는 더욱 하찮은 대접을 받았다.

멸치는 한문으로 업신여길 '멸(蔑)'자를 써서 '멸어(蔑魚)'라고 했다.

혹은 금방 죽어 사라진다는 뜻으로 '멸어(滅魚)'라고 했다.

멸치는 성질이 급해서인지 잡히면 곧 죽으며, 빨리 부패한다.

잡은 멸치를 바로 삶고 말리는 가공 처리를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부패한 멸치를 상당수 거름으로 사용했다.

 


■ 뭉쳐서 사는 멸치 떼

   
우리나라 대표적인 멸치 어장인 부산 기장군 대변항에서 어부들이 그물에 걸린 싱싱한 멸치를 털고 있다.


조선시대 멸치는 나쁜 기운이 있는 곳에서 잡히며, 열병이나 풍토병을 일으키는 물고기로 여겼다.

조선의 대표 수산학자인 정약전은 멸치를 "선물용으로는 천하다"

하였다.

기껏 멸치는 말려서 양념으로 사용하며, 젓갈용으로 쓰는 물고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멸치를 하찮게 여기는 이유는 이의 생물학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청어목 멸치과의 바닷물고기인 멸치는 작고 길며 납작하다.

생김새가 비호감이다.

멸치를 말리면 작게 오그라들고 뻣뻣하여 육질이 거의 없다.

조선시대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조기, 명태, 청어 등이 풍부한 살코기와 탄탄한 몸매를 지닌 점과 대조된다.


멸치는 길이에 따라 대멸, 중멸, 소멸, 세멸로 구분하는데, 대멸이라 해봤자 7.7㎝에 불과하다.

이렇게 작은 멸치는 뭉쳐서 사는 특징이 있다.

멸치는 많게는 수억 마리 이상이 몰려다니며, 그 작은 몸으로 5000개을 낳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멸치를 잡다가 그물이 끊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처럼 한꺼번에 엄청난 멸치를 잡다 보니 천한 물고기란 인상을 받게 된 것이다.


■ 짭짤한 기장의 멸치 어장

하지만 부산 사람은 멸치 앞에 '하찮은'이란 수식어를 붙여서는 안 된다.

멸치는 부산의 주요 어종일뿐더러 짭짤한 수익을 주는 귀한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기장의 멸치 축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장 앞바다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멸치 어장이다.

전국 멸치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하기에 '멸치'하면 '기장군'을 떠올리게 한다.

기장에서는 18회 멸치축제를 이어가고 있는데 하루에만 수십만 인파가 몰린다.


멸치는 봄에 남해에서 출발해 북한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회유성 어종이다.

부산 일대 바다에서는 4~6월 사이에 많은 멸치가 잡힌다.

과거에는 기장뿐만 아니라 부산 곳곳에서 멸치잡이가 성업을 이뤘다.

원래 해운대 동백섬 앞에도 멸치 어장이 있었다고 한다.

한때 여기서 잡힌 멸치가 부산 멸치의 70%를 차지하였다니 해운대 앞바다도 귀한 멸치 어장이었다.


■ 다대포 멸치 후리는 소리

멸치를 잡는 전통어법으로 남해안의 죽방렴이 잘 알려졌다.

이것은 대나무로 어살을 만들어 좁은 해협에 세워 고기를 잡는 어법이다.

조석 간만의 차이를 이용해 밀물 때 들어온 멸치가 썰물 때 문이 닫히면서 함정 장치에 갇히게 된다.

죽방렴은 생태 어법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실제 전통적 멸치잡이의 대표적 사례는 후릿그물 어법이었다.

멸치 후리질 어업은 넓은 모래사장이 형성된 곳에서 가능했다.

바다로 나가서 멸치를 띠 모양의 망으로 에워싼 뒤 모래사장에서 그물을 끌어당기는 어법이다.

부산 일대에는 후리질을 하기 좋은 해변이 많았다.

후리질은 매우 고된 노동이기에 노동요인 '멸치 후리는 소리'가 발전하였다.

부산에서는 다대포의 '멸치 후리는 소리'가 부산시 무형문화재 7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0년대 목재공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다대포는 아름다운 포구이자 어촌이었다.

멸치 성어기에는 후릿그물을 털면서 부르는 흥겨운 멸치 후리는 소리가 이렇게 들려왔던 곳이었다.

'어데서 놀다가 이제사 왔나. 기장 바다에서 놀다 왔나. 대마도 바다에서 놀다 왔다.

학수고대 기다린 메르치 오늘날에 당도하였네'.


■ 강골의 야당 총재 만든 멸치

김영삼 전 대통령을 보면 멸치가 떠오른다.

1990년 3당 합당 전까지만 해도 김 전 대통령은 강골의 야당 인사였다.

그가 혹독한 유신 시대를 거쳐 최고의 야당 인사로 부상한 것은 멸치의 힘 덕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스스로 고향이 두 곳이라 말한다.

태어나고 자란 유년기의 고향인 거제도와 정치가로 성장한 제2의 고향인 부산.

부산의 서구가 당시 최다선 국회의원 김영삼을 키운 지역구다.

그는 남해에서 멸치 어업을 하는 부친 김홍조 씨 슬하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그가 걸음마를 하자마자 맛본 것이 멸치였다.

세 살 때 혼자서 바닷가에서 놀다가 말리고 있는 멸치를 보고 정신없이 집어먹었다고 한다.

짜디짠 멸치를 배가 터지도록 먹다 보면 갈증이 나고 속이 타기 마련이다.

급한 김에 뛰어간 곳이 논배미의 물고랑이었다.

논배미에 엎드려 물을 마시다 그만 올챙이배가 되었다고 한다.

영양분이 풍부한 멸치를 먹고 자란 그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꿈을 꾸었고, 최연소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최연소 야당 총재까지 되었다.

1979년 신민당 총재가 될 때에도 멸치의 덕이 컸다.

자금이 부족하다 보니 자신을 도와주는 당원들에게 부친이 보내 준 멸치를 선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멸치를 받은 당원들이 열심히 성원해준 덕에 그는 당당히 신민당 총재가 될 수 있었다.


■ 멸치, 은빛을 뿌리며 하늘로 비상

구한말 일본인이 조선의 멸치 어장에 진출하면서 멸치의 씨가 말랐다.

일본인은 근대식 어법권현망 어구를 사용하여 경남 해안가의 멸치를 남획했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주야를 가릴 것 없이 멸치를 잡았다.

분노한 조선인 의병은 일본인 어민을 살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멸치가 떠나지 않고 식민지의 어두운 바다를 지켜온 결과, 지금까지 우리는 풍성한 식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 멸치를 '하찮은 생선'이라 부르는 일은 언감생심이 되었다.

버리는 것 하나 없이 머리와 내장을 통째로 먹는 생선은 멸치밖에 없다.

멸치는 우려먹고, 말려 먹고, 볶아먹고, 삭혀 먹는 긴요한 식재료이다.

자기 몸의 모든 것을 바쳐 우리의 입맛을 돋우어 준다.

매년 오월이면 기장의 멸치축제에서 하늘로 비상하는 멸치를 볼 수 있다.

어민이 그물을 출렁일 때마다 멸치가 은빛을 뿌리며 튀어 오른다.

멸치는 더는 하찮거나 사라지는 멸어가 아니라 비상하는 생선이다.


# 1814년 정약전 쓴 '자산어보'

- 불 밝혀 잡는 '챗배어업' 기술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귀양갔던 정약전1814년에 쓴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 서적이다.

정약전은 잘 알려졌다시피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대단한 관찰력으로 정약용 못지않게 귀한 연구서를 남겼다.

'자산어보'에서는 멸치(사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멸치는 몸이 매우 작고 큰놈은 서너 치, 빛깔은 청백색이다. 6월 초 연안에 나타나 서리 내릴 때 물러간다. 성질은 밝은 빛을 좋아한다. 밤에 어부들은 불을 밝혀 멸치를 유인하여 함정에 이르면 손 그물로 떠서 잡는다. 이 물고기로는 국이나 젓갈을 만들며 말려서 포로도 만든다."

멸치를 손 그물로 떠서 잡는 방식을 '챗배어업'이라 한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까지 조선 어민이 많이 했던 멸치잡이 어법이다.

멸치는 불을 따라 몰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야간에 횃불을 환히 밝혀 멸치잡이를 했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