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1-4> [남구의 숨겨진 스토리들]- 노숙 삼대; '적기 보물찾기'(엽편소설)
용호·우암·감만동 바다 어딘가에 일본군이 수장시킨 보물이 있단 말입니까?
일러스트레이션=서상균 기자 seoseo@kookje.co.kr |
퇴직한 뒤 가족에게 버림받고
송도 앞바다에 뛰어들고 싶어하지…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소
도사같은 노숙인이 잔을 권하며 말했다
용두산 어딘가 묻혀있다는 보물지도
죽으려던 내게 생명의 등불이 됐지요
나는 느꼈소, 당신은 나의 길을 갈 거요
누가 알아요, 어마어마한 행운이
20년도 안 돼서 당신을 찾아올 지...
배억만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진 그의 어깨 위로 저녁 어스름이 한 무게를 더 보태는 것 같다.
조금 전까지 깃발 따라 다니던 일본 관광객마저 내려가버린 용두산 공원에는
사람의 발길이 뚝-하니 끊어져버렸다.
배억만은 쉴 곳이 필요했지만 마땅히 갈 곳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해도 그를 기다리거나 찾는 사람은 없다.
아니, 그가 저 송도 앞바다에 몸을 던져 그냥 사라져 버린다 해도 세상은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는 그것을 깨달았다.
퇴직하고 나서 딱 한 달만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두 딸과 아내가 있었지만 대화를 해 본 적이 아득했다.
남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남이라면 섭섭한 마음이라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동안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너무 일에 바빠 남처럼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아니 그것을 소홀히 여겼다.
어느 순간 그는 아내하고도 딸하고도 대화하는 것이 무척 서툴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화만 서툰 것이 아니라 가족과 같이 즐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집에서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같이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정에서 자신은 그저 꿔다 놓은 소금자루처럼 아무런 역할을 못하거나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아내나 딸은 자신을 이해해줄 줄 알았다.
생각할수록 마음의 상처만 갔다.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자랄 때부터 누구에게 부담 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것이 가까운 혈육일수록 더욱 심하다는 게 그로 하여금 견딜 수 없도록 했다.
그래서 집을 나왔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사랑하는 가족에게 실망하기 싫었다.
배억만은 벤치에 팔베개를 하고 길게 누웠다.
하늘에는 시커먼 구름이 끼여 있었다.
그 구름들 틈 사이로 별이 하나 둘 보였다.
피곤 탓인지 잠이 스르르 찾아왔다.
그것은 매우 안온한 느낌이었다.
갈 곳이 없어도 아무런 걱정이 들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마음이 편하다는 것, 그것이 혈육의 정보다 중요했다.
초저녁에 먹은 술기운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조화인가.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하늘이 내 작은 안식마저 방해하는가, 하는 원망을 하다가 곧 마음을 바꿔 먹었다.
퇴직하고부터 그가 깨달은 세상 이치 중 하나는 '세상에 대해 원망하지 말자, 인간은 단 일초도 거꾸로 돌릴 수 없는 존재다'였다.
그래서 모든 일을 그냥 묵묵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족이 자신을 꿔다 놓은 소금자루 취급해도 화를 내거나 반발을 하지 않았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시간을 되돌려 놓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하늘을 원망하는 일이었다.
비방울이 조금 더 굵어졌다.
조금 더 견뎌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 결심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상황이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 공원을 내려가 지하도로 갔다.
한적한 지하도도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지하도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혹시나 해서 공원에서부터 챙겨온 신문지를 깔고 벽에 니은자로 기대앉았다.
저 만큼 건너편에 뭔가가 보였다.
아무에게도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는데 또 빗방울 같은 훼방꾼인 것 같아 긴장을 했다.
가만히 보니 박스더미였고, 박스더미 옆에 한 사내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는 표정이 조용한 분위기처럼 무척 안정감이 있어보였다. 그는 경계심을 풀었다.
낮에 용두산 공원에서 만난 도사였다.
그가 도사라고 하는 것은 산발한 흰머리가 도사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배억만은 그날 낮 내내 공원 근처에 있었다.
캔 맥주에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하염없이 영도쪽 바다만 보다가 한 이상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도사였다.
도사는 돌계단 측면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배억만은 좋은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한동안 도사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사가 다가왔다. 배억만은 대뜸 자기가 먹던 맥주 캔을 내밀었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갑자기 도사가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에게 곧장 다가왔고, 당황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공손하게 내미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도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캔을 받아 맛있게 마셨다.
그리고 도사는 아무 말도 없이 돌계단으로 내려가 버렸다.
배억만이 도사에게 지하도 분위기처럼 조용히 목례를 했다.
도사가 오라고 손짓을 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옆에 앉으라고 했다.
신문지보다는 훨씬 푹신하고 좋았다.
도사와 배억만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나란히 앉았다.
도사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아까 맥주는 고마웠소."
"목말라 하시는 것 같아서…."
"그렇소. 지금 당신이 소주 한 잔과 포근한 잠자리를 원하는 것처럼…."
"그걸 어떻게 압니까?"
"우린 여기서 모르는 것이 없소. 심지어 밖에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도."
배억만은 역시했다.
도사의 인상이 계룡산 도인(道人) 같았다.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는 소주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도사에게 잔을 올렸다.
도사는 잔을 받자마자 바로 마시고는 배억만에게 권했다.
"뭐 놀랄 것 없소. 이 자리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이 위로 지나는 모든 것들을 알 수 있다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와 직업, 심지어 그들의 지금 기분까지 짐작을 할 수 있다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 읊는다지 않소. 이 자리에 20년을 지내노라면 그 정도는 알 수 있소."
도사의 얼굴에 20년 풍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있을 자리는 깊은 산중이지 지하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20년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20년 전 당신과 똑 같은 심정으로 이 자리에 있었소."
"아니, 지금 저의 심정을 아신다 말씀입니까?"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퇴직을 하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당한 처지라는 것도, 여차 하면 송도 바다에 뛰어드는 것까지…."
배억만은 일어나 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족집게 도사처럼 알아 맞추니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병상련의 아픔까지 같다니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수 가르쳐 달라는 의미로 소주잔을 공손하게 올렸다.
"존경합니다. 선생님…."
배억만은 한 번 더 고개를 조아렸다.
"그때 나는 이 자리에서 당신처럼 나와 비슷한 노인네를 만났소. 내 호주머니에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약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보다는 술에 취해 그냥 송도 바다에서 사라져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소. 그러다 그 노인을 만났고 그 노인은 내게 빛을 하나 던져줬소. 그것은 꺼져가는 내 생명의 등불이 된 셈이지요. 그 등불은 20년이나 꺼지지 않고 있소. 난 아직도 꿈을 찾고 있소."
"그럼 아까 돌계단에서 뭔가를 찾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까?"
"그렇소. 그게 어마어마한 보물지도요. 당신이 알면 기절할 정도의…."
도사가 너무 쉽게 말해버렸기 때문에 배억만은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도사의 표정은 농담과 한참이나 거리가 멀어 보였다.
배억만은 도사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보물지도이기에 20년이나 찾고 있습니까?"
도사 이야기에 의하면 과거 일제시대 일본군은 2차대전 당시 용호동과, 우암동, 감만동 일대의
세칭 적기만에 해저 잠수함 기지를 건설했다.
대동아 전쟁 막바지 부산 아카사키(赤崎)만에 주둔한 일본군 독고부대는 군비자금용으로 한국과 중국 등지에서 강탈한 수조 원대의 금붙이를 미처 일본으로 빼돌리지 못하고 적기만 해저 잠수함 도크와 어뢰공장, 화약공장과 군수물 창고 속에 매몰시켜둔 채 퇴각했다.
당시 독고부대가 파묻은 노다지는 금괴 수백 톤과 금동불상 36좌, 은 350톤, 비취불상 1좌, 다이아몬드 1600개,
수은, 텅스텐, 니켈 200 상자와 각종 패물 등이었다.
독고부대 사령관은 기지 내부도와 배치도 등 보물을 수장한 4장의 비밀지도 만을 갖고 일본으로 쫓겨갔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1960년대 후반에 한 일본인이 그 보물지도를 가지고 부산을 찾았다.
그는 한국인 동업자가 필요했고, 그 동업자를 물색하던 중 의문에 죽음을 당했다.
그러면서 보물지도마저도 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때 사라진 보물지도가 어떤 이유에선지 용두산 공원 돌계단 어디쯤에 묻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돌계단에는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문양 표시를 해두었는데 그것을 도사가 만난 그 노인이 알고 있었고, 비밀은 노인으로부터 지금의 도사에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돌계단에 보물지도를 감춘 사람은 누구이며 그 노인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가하는
의문이 남았다.
그 점에 대해 도사는 그 노인이 아마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가 범인을 찾아냈고, 범인이 형사가 추적을
해오자 자신만이 아는 돌계단에 숨겨놓고 형사와 협상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형사가 보물지도의 상세한 소재를 알기도 전에 범인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 바람에 사건은 그냥 묻혀버렸지만 형사에게는 보물지도에 대한 약간의 정보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 형사가 바로 도사가 만난 노인이라고 했다.
도사도 애초에는 그 보물지도에 대해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단지 죽으려던 자신에게 살아야 하는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욕심이 보태지면서 보물지도는 그에게 삶의 대한 보람과 의지와 꿈이 되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이치까지도 깨닫게 되는 도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보물지도를 찾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해도 불만은 없었다.
도사는 배억만에게 보물지도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이야기했지만 결정적인 문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소주병을 깨끗이 비운 뒤에 두 사람은 박스 하우스에 나란히 누웠다.
생각보다 안온했다.
"도대체 그 동화 같은 보물지도라니…. 어쩌면 형사가 잘못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그 일본사람이 가지고 온 지도도 가짜일 수 있고…."
배억만은 못내 그 의심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확인해 봤다.
"그건 분명 있소. 아니면 내가 20년을 이렇게 허비하고 있겠소. 이 자리에 누워 바깥에 지나가는 사람의 기분까지 파악하는 내가 말이오…."
배억만은 긍정하기로 하면서 잠을 청했다. 그때 도사가 잠꼬대 같은 소리를 했다.
"당신은 지금 긴가민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보물지도는 분명 있소. 당신은 곧 나의 길을 갈 것이요. 나는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단번에 그것을 느꼈소. 운명, 운명이라는 것 있잖소. 누가 알아요…. 20년이 아니라 그 이전에 어마어마한 행운이 당신을 찾아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지…. 하지만 난 틀렸소. 당신 차례가 온 것이오."
박명호 소설가
〈부산남구 스토리 시리즈 끝〉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남구
1950년대 초의 부산 남구 감만동 일대 모습. 이 지역 해안가 어딘가에 일제가 철수하면서 각종 금은보화를 묻어놓고 떠났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한때는 그 보물지도에 대한 이야기도 떠돌았다. 김한근 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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