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부산의 전설 보따리] <17> 동래 '관황묘'

금산금산 2014. 5. 10. 09:26

[부산의 전설 보따리] <17> 동래 '관황묘'

여씨 성 사람은 영(靈) 근처에만 가면 실신

 

 

- 장소: 동래구 명륜동
- 부사 박제관 관황묘 세워
- 어느날 꿈에서 관운장 만나
- 아기장수 죽은 집터로 묘 옮겨

- 명나라서 세웠다는 설도

- 여몽에 죽은 촉나라 장수 관우
- 여씨 성이 가까이 오면 죽게해
- 지금도 여씨 성 영당 출입 안해

 

관황묘의 관황 영정



지금의 동래구 명륜동 477번지관황묘(關皇廟·관우가 죽은 뒤 그를 높혀 관왕 또는 관황이라 함)가 있던 자리는 김 장군이라는 아기장수가 태어난 집터이다.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일어서고 천장에 달라붙기도 하는 신동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김해의 송 장군은 이곳에 찾아와 아이의 골상을 보니 장래 비범한 사람이 될 것으로 판단,

다가올 앞날이 두려워 즉석에서 이 아이를 죽였다.

이때부터 이 자리에는 저녁만 되면 천병만마가 달리는 말굽소리와 군신들의 다투는 함성이 들려

부득이 공지로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874년 2월 동래 부사로 부임한 박제관관황묘를 세웠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한다.

즉 박기체라는 동래사람이 부산의 김모 씨 집에 놀러 갔더니

관황의 영정에 관우 신장의 위패를 세워놓고 무엇인가를 빌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박 씨는 이상히 여겨 "노형은 어찌하여 관황의 영정에 관우의 신위를 세워놓고 공손히 빌고 있는거요"라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이 신장은 관운장이온데 무엇이던 빌기만 하면 효험이 나타나기에 제가 이렇게 모시는 거요"였다. 그러자 박 씨는 "노형, 이 영정을 내게 주신다면 노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제가 성의껏 모시겠소"라고

애걸한 끝에 관황의 초상화를 얻게 되었다.


이 무렵 동래부사 박제관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차에 어느날 꿈속에서 관운장을 만났다.

관운장은 "부사, 나는 지금 고독하게 묻혀 있으니 넓은 자리로 옮겨주시오"라고 하지 않는가.

꿈에서 깨어난 부사는 정말 신기해 해몽 끝에 김 장군이 죽은 집터에 관황묘를 세웠다고 한다.

한편 1878년 동래부사 황정연이 사당을 짓고 논 열 마지기를 주어 관황묘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지금도 관황묘 아래 옛 집터에는 '김장군 신위'라는 글이 씌어 있다.


동래 관황묘에 관한 전설은 또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이 왜병과 싸울 때 관운장이 신병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국난을 도와주었다.

당시 명나라의 조정은 관운장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은 4000냥을 들여

조선 땅 여러 곳에 관황묘를 세우게 했다.

해서, 서울의 남관황묘는 명나라 장수였던 양호와 만세덕이,

청주에는 명나라 장수 모국기가 세웠고,

명나라 도독 유정은 남한 각지에 많은 관황묘를 세웠다.

그러나 동래의 관황묘는 명나라 장수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관황묘 회원인 박진희, 신동섭이 증언하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아직 알 수가 없다.

또 한 가지 설은 동래에 옛날 관운장의 영정과 김 장군의 위패를 모시던 관우묘가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묘(廟)를 영당이라 부르며 1년에 2회(탄일 5월 12일, 기일 10월 19일)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 이 묘를 지을 때의 일이다.

여러 인부들이 기왓장을 지게에다 지고 사다리를 밟고 그 묘의 지붕에 올라가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 인부 중 여(呂)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그 지붕 위에 발을 올리려고 하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을 잃어 그만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는 옛날 중국 삼국시대의 촉나라 장수 관우가 여몽(呂蒙)에게 죽었으므로

관우는 그 원한으로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영(靈) 근처에만 오면 죽게 했다.

죽은 그 인부도 그래서 죽은 것이라 한다.

그 뒤로는 이것을 모르고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영당 안에 들어오다가

갑자기 눈에서 피를 흘리며 기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 영당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