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4-5>
[부산시민공원 스토리]-
새로운 시민들의 합창
다시 찾은 땅, 다시는 빼앗기지 말라 염원…우리는 하늘을 떠받드는 나무부터 심었다
부산시민공원은 우리 민족이 다시 찾은 자존의 땅이다. 이곳에 나무를 심고 미래 세대를 위해 씨앗을 뿌리는 등 시민들의 새로운 합창이 울려퍼지고 있다. 국제신문 DB |
일제가 할퀴고
미군이 주둔하고
수난과 모멸의 100년
오롯이 우리 것이되
남의 것으로 사용된
침탈과 수탈의 땅
그 위에 세워지고
그들이 사용한 건물들
우리가 만들진 않았지만
시민 품으로 돌아와 의탁
이젠 그것마저도 우리 것
새로 색칠하고
수선을 한다해도
건물 뼈골 깊숙이 박힌
민족 자존심의 훼손
그 상처 감출 수 없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
이 건물들은 말한다
힘을 키워서 일어서라
더는 점령당해 상처받는
아픈 역사 되풀이 말라고
후대에 소리없는 교훈을
[부산시민공원]은 우리 민족이 다시 찾은 땅이다.
시민들이 그곳에 맨 처음 한 일은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나무]는 하늘을 떠받드는 기둥이다.
시민들은 다시는 하늘이 무너지지 말라고 더 큰 뿌리를 뻗어 이 땅을 굳건히 움켜쥐어 달라고
마음을 모아 나무를 심었다.
그 크고 높은 기둥들 사이로 저들이 남기고 간, 그리고 우리가 버리지 못한 아픈 유산들이 군데군데 서 있다.
비록 내가 세우지는 않았지만 상처도 내 것이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남겨진 건물들은 이 땅의 쓸쓸한 풍경을 말해주고 있어
두고두고 민족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푯대로 받아들여진다.
시민공원이 된 이 땅은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의 근거지였고,
해방과 함께 찾아온 [한국동란] 때부터는 미국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암울했던 일본제국주의의 침탈과 약탈의 흔적이 담겨 있고 민족 차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우울한 땅이다.
남아 있는 이국적인 건물들이 그것을 말해 준다.
칠과 수선을 새롭게 한다 해서 감춰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용되던 이력은 건물 뼈골 깊이 박혀 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약자는 언제나 지배자의 논리에 의해 휘둘린다는 것을...
이 땅에 타국의 군대가 주둔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므로 아픈 상처도 기억해 둘 일이다.
# 공원역사관
공원역사관 |
부산시민공원 내 여러 동의 건물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공원역사관이 된 이 건물은 물 건너 먼 이국에 온
미군들의 정서를 추스르기 위해 클럽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집 떠난 사람]들이 하루 중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은
허공을 떠돌던 새들이 집을 찾아 들고 깃을 접는 저물녘이다.
미국사람들이라고 다를 바 없다.
이곳은 일과를 마친 장교들이 이른 저녁 시간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들어 커피를 나눠 마시거나 혹은 맥주잔을 기울이며 고국에 두고 온 가족들 이야기,
친구 이야기로 타국에서의 외롭고 쓸쓸하고 지루한 시간들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가족을 동반하지 않은 장교들이나 저녁 시간에 짬을 내어 산책하러 나선 가정을 지닌 장교들이
주로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
휴식 문화가 앞선 미국 사회의 일면이 담겨져 있어 부러움을 주는 건물이다.
사랑방 문화를 지닌 우리는 일상에서 특별하게 클럽을 만들지 않는다.
지금은 공원 부지의 역사를 오롯이 담은 '공원역사관'으로 리모델링되어 그런 애환은 벽 속에 숨겨져 있다.
그곳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벽 속의 편지를 읽어 보는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 뽀로로도서관
뽀로로도서관 |
시민공원 내 건물들 중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특이한 모양]의 건물이다.
마치 비닐하우스처럼 생긴 구조물이다.
반원으로 잘린 벽과 지붕이 둥글게 이어진 모양의 건물들이 엎드려 있다. 건물이라기보다는 예쁜 구조물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지금에 와서야 이 모양이 특이하여 낯선 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지만
애초에 이 집은 간이식으로 조립되어진, 텐트가 진화된 형태의
[군대 막사]였다.
퀀셋막사라 불리는 이 가건물은 신속하게 지을 수 있고 내구성도 갖추고 있다.
이 집은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사용]하던 군용텐트를 대체하여 군인들의 숙소로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군용텐트는 한국의 습한 여름 기후 때문에 수명이 짧고 불편했고, 겨울철 화재사고에도 취약하였다.
이 땅에 파견되어 온 미군들은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서 쉽게 고국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전쟁은 지속되었고 정전이 된 후에도 사병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미군들이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가장 불편했던 것이 숙소였고 천막으로는 장기간을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손쉽게 설치할 수 있고 철거가 가능한 반영구적 구조물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건물들은 1970년대까지 사병들 숙소로 이용되었다.
사병들은 훈련 후 남는 시간들을 위해 천정과 이어진 벽면에다 늘씬한 여배우들의 사진을 다닥다닥 붙였다.
여배우 사진에는 요염한 마릴린 먼로나 깜찍한 오드리 햅번의 사진도 있었다.
젊은 사병들은 휴전 기간의 무료한 시간들 혹은 한국 땅에 파병되어 있는 동안 보내야 했던 긴 시간들을
여배우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함께 했다.
어찌 보면 그들에겐 힘든 시간들 그리고 이 땅이, 이 건물이 창살 없는 감옥이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 콘크리트 숙소가 보편화되면서 퀀셋막사는 숙소 대신
행정실이나 창고 등의 기능을 맡는 것으로 임무가 교체되었다.
한때는 일부가 유치원 건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동심을 자극하는 모양을 적극 활용하여 어린이를 위한 '뽀로로 도서관' 및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 문화예술촌
문화예술촌 |
이 땅에 미군이 진주한 것은 해방과 함께였다.
그들은 해방군으로 혹은 점령군으로 당당하게 입성했다.
그들에겐 숙소가 필요했고, 잘 알지 못하는 한국식보다는
일본식 목조건물 형태를 선호했다.
미군들은 건물을 지으면서 목재도 이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닌
일본에서 제재하여 들여왔다.
이 땅과 이 나라에 대한 그들의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미개발국으로 알고 이 땅에 진주한 미군과 UN 고문단을 위한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해방 이후 지은 건물로
추정되지만 이 건물 신축공사는 우리나라 기술자들이 참여할 구실도 갖지 못했고 그들은 이 땅 사람들을
알고 있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우리 국민은 단지 미개한 피지배자일 뿐이었고 자신들이 해방시켜 준 피정복자들이었다.
배우지 못하고 깨우치지 못했기에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자신들이 이런 지배구조를 타파해 해방을 갖다 준
은혜를 베풀었다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과 대적했던 그리고 항복한 일본인들을 더 신뢰했다.
그래서 이 땅에 자신들의 숙소를 지을 때 한국식 보다는 일본식 목조건물을 생각한 것이다.
한국식 가옥은 불편하고, 불결하고, 짓기에도 귀찮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유엔군 숙소]가 일본식 건물이 된 이유였다.
이 일본식 목조건물은 해방 후 지어졌다는 시간적 이유로 핍박받지 않았고, 일제 침략에 이용되지 않은
건물이기에 우리에게도 용서가 되었다.
미국인들에게는 일본식이냐 한국식이냐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방과 함께 이곳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사용된 이 건물은 [6·25 전쟁 이후]에는
부산지역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하사관과 그 가족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었다.
때로는 2~3명의 하사관이 쓰거나 또는 사병이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시민공원이 된 지금은 방문객 문화체험 및 전문작가 창작활동을 위한 [참여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민족 자존심을 훼손하게 한 뜻이 담긴 일본식 목조건물 속에서 우리 예술의 창작활동이 펼쳐지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다솜관
다솜관 |
[다솜관] 건물은 시민공원 내 보존 건물들 중 가장 늦은 시기인
1980년대 후반에 지어졌다.
부족한 장교 숙소와 부대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군대 특성상 철저한 계급 분화를 사생활 속에서도 실천한 모습이
담겨져 있는 건물이다.
장교와 사병은 건널 수 없는 층계를 만들어 놓고
이를 철저하게 지켜나간 병영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이 무너지면 군대 기강이 해이해지고 지휘체계가 망실된다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 건물 또한 사령관 관사나 하사관 숙소와는 별도로 만들어져
장교들을 그들이 지켜야 할 엄격한 틀 속에 가두었다.
섣불리 위쪽과 교류를 나누지 못하게 하였고, 아래쪽과도 철저하게 분리를 시켜 놓은
계급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장교는 장교끼리만 교우하는 철저한 계급사회를 구현한다.
원래 이 자리는 미국인 고등학교로 사용되던 몇 개 건물들이 있었다.
그것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신축한 건물이다.
지금은 각종 세미나와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 숲 속 북카페
숲 속 북카페 |
이 건물은 부산의 미군 기지를 총괄하는 캠프
하야리아 사령관이 거주하던 숙소였다.
6·25 전쟁 후 미군의 위세가 등등하던 때인 초기에는
대령이 사령관직을 맡았었고 그때는 건물 전체를 사용하여
사령관의 권위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후 지위가 중령으로 낮아지게 되면서
동급의 [항만부대 사령관]과 함께 이 건물을 나누어 사용하게 했고,
부대가 [폐쇄되기 직전]에는 사령관직을 소령이 맡아 사용하였다.
철저하게 실용주의적인 권위를 지켜왔던 캠프 하야리아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지금은 '숲 속 북카페'로 리모델링되었다.
# 시민사랑채
시민사랑채 |
미국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이며 가족 중심적이다.
해외 파견 군인에게도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권리를 유보시키지 않는다. 본인이 원한다면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 주는 것이다.
이 건물은 1960년 미군부대에 거주하던 미군 가족과 미국인 등을 위해
설치한 영내 학교로 [한국 내 최초로 건립된 미국인 학교]이다.
초중등 과정을 기본적으로 설치하였으며
80년대에는 별도 건물에 분리되어 있던
고등학교 과정을 합쳐서 운영했다.
유치원은 인근 퀀셋막사에 별관 형태로 운영하였다.
지금은 학교와 체육관을 포함한 전체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강의·세미나·전시 등을 위한
'시민 사랑채'로 활용하고 있다.
# 흔적극장
흔적극장 |
미군은 진중에서도 여가를 즐길 줄 아는 군대였다.
[충분한 휴식]은 그만큼 전투력을 배가시킨다는 평범한 전략을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이 극장 건물의 잔해다.
물론 동반한 가족이나 이 땅에 거주하는 자국인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였지만, 진영 내에 클럽이나 영화관을 지어 여가시간을 통해 충분한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행복한 국민이며 부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병영생활을 누렸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개인적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 ]또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잔해로 남은 건물은 한국전쟁 시기에 미군들의 위락과 사병교육을 위해 세워진 영화관이었다.
초창기에는 '할리데이 영화관(Holiday Theater)'이라 불리다가
1980년대에는 '경마장 영화관(Paddock Theater)'이라 불렸다.
미국 현지 개봉 영화들을 직수입해 상영하였기에 일부 한국인에게도 관람을 허용했다.
영화관 출입이 가능했던 일부 부산 시민들에게는 미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이곳에 출입하여 영화를 보거나 간혹 미군 영내 피엑스에서 담배나 양주를 사서 나오기도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떤 치외법권적 특권을 지닌 것처럼 우쭐대기도 하였다.
미국인과 친분이 있으면 그곳에 평소에도 출입이 가능했다.
일반 시민들이 갖지 못한 또 다른 문화 혜택을 누리기 위해 '얌생이를 몰러 간'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영화관 입구만 남아 있으며 야외공연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강영환 시인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시설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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