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연산동 고분군 베일을 벗기다] 2. 연산동 유물들 왜 '일본박물관'에?

금산금산 2014. 7. 21. 11:58

[연산동 고분군 베일을 벗기다] 2.

'연산동 유물'들 왜 '일본박물관'에?

 

 

"일제강점기 주민에 돈 주며 도굴 부추겨"

 

 

 

 

판갑옷(왼쪽)과 차양투구. 판갑옷은 띠 모양의 철판으로 골격을 갖춘 후, 여기에 삼각형의 철판을 재단해 못으로 결합했다. 차양투구는 반구형 모습에 반원형의 챙이 붙어 있다.

 

 

유물 1.

 칼 손잡이 끝 부분이 둥글다.

흔히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있는 환두대도(環頭大刀)와 많이 닮았지만 확연히 다르다.

손잡이 부분엔 검은 옻칠이 되어 매끄럽다.

손잡이 끝 부분의 측면에는 금판을 '∩'모양으로 붙여 장식해 놓았다.

손잡이와 머리 사이에는 눈금을 새긴 금판을 감았다.

금으로 꽃모양 장식도 했다. 정교하다.

칼집과 칼집 사이에는 은판이나 금테를 둘러 옻칠로 장식했다.

유물 2. 반구형 모습에 반원형의 챙을 붙인 투구다.

  챙이 달린 투구의 한 형태로 일본에서는 눈썹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미비부(眉庇付)투구라고 한다.

투구는 상·중·하위의 띠판으로 나뉘는데, 그 사이를 다양한 모양의 철판으로 채웠다.

투구의 뒷면에는 가리개가 띠 모양으로 드리워져 있다.



원두대도·차양투구 등 4점
사용자 높은 신분 추정 가능
일본인 오구라 통해 넘어가
'도굴 유물 수 상상 이상일 것'


합천 옥전고분군 출토 용봉문 환두대와 손잡이 끝 부분. 부산일보 DB

유물 1은 '원두대도(圓頭大刀)'이고 유물 2는 '차양투구'이다.

 두 유물은 모두 일제강점기 연산동 고분군에서 나온 것들이다.

모두 도굴된 유물로 지금은 일본 도쿄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원두대도의 길이는 90㎝를 넘는다.

흔히 칼의 손잡이 끝 부분에 둥근 고리가 있는

 [고리자루칼]로 불리는 환두대도는 신라와 백제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고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두대도는 국내 출토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편이다.

창녕 계성 고분군, 양산 부부총, 나주 다시면 복암리 등에서

원두대도가 출토된 바 있지만 양산 부부총이나 창녕 계성 고분군 칼은 연산동 고분군에서 나온

원두대도보다 작다.

도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연산동 고분군 유물인 원두대도. 부산박물관 제공


칼을 통해 그것을 사용한 사람의 신분을 추정하는데, 원두대도의 문양과 화려함으로 보아 사용자의 신분이 꽤 높았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도쿄박물관에는 원두대도차양투구 외에 갑주(판갑옷과 투구) 2점까지

모두 4점의 연산동 고분군 유물이 보관돼 있다.

4점 가운데 특히 판갑옷과 투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삼국시대 갑옷과 투구의 존재를 알린 유물이기도 하다.

 연산동 고분군이 세상에 알려진 게 바로 이로 부터다.



그렇다면, 이 [유물들]은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박물관에 남아있게 되었을까?

연산동 고분군에 주목한 사람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었다.

도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부산 연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4점은 '오구라 컬렉션' 수장품 중 일부이다.

일본인 전기 사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제강점기인 1921년부터 우리나라 곳곳의 많은 유물을 강탈, 강제 매집한 인물이다.

특히 경상도 지역의 유물을 훑었다고 알려져 있다.

오구라가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이 문화재 1천여 점을 도쿄 국립박물관에 기증했지만,

아직도 도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부산박물관 홍보식 [문화재조사팀장]은 "연산동 고분군은 해방 이전부터 자연적 훼손은 물론, 도굴로 극심한 인위적 훼손까지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연산동 고분군에서 도굴된 유물의 양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산동 고분군은 해방 이후 거의 30년이 지날 때까지 보호나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있다가

197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산시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됐다.

기념물 지정이후, 부산시와 연제구청은 문화재보호구역 내의 사유지를 꾸준히 매입하고,

각종 인위적인 행위에 의한 고분군의 훼손을 막았다.



1970년대 부산시청 문화공보실 문화계장을 지낸 김부환(74) 씨는 "부산시 지정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현장을 갔었는데, 당시 연산동 고분군 인근 지역 주민들로부터 일제강점기 전기회사를 경영하던 일본인이 주민에게 도굴을 해오면 얼마를 주겠다는 식으로 도굴을 부추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이런 진술과 발견 당시의 상태, 여러 정황으로 미뤄

연산동 고분 유적의 상당수가 불법적인 도굴로 훼손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산동 고분군의 갑주류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1980년대 후반기부터는

중요한 유적으로 국내외 학계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1987년 12월부터 신라대, 경성대 박물관의 조사가 있었고

1989년 11월 몇몇 고분을 통해 무덤 앞에서 다양한 제사(묘제)가 이뤄졌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특히 1987년에는 대형 고분인 M4호와 M8호에 대한 발굴조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오구라 컬렉션이란?

일제강점기 기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1870~1964)가 빼돌린 한국 문화재 1천100여 점을 말한다.

 오구라는 일본 고대사와 극동의 퉁구스족 문화연구에 공헌한다는 미명 아래 조선의 문화재를 수탈해갔다.

그는 주로 도굴꾼들을 앞세워 발굴 수집한 귀중한 문화재들을 일본 패망과 함께 그대로 일본으로 빼돌렸다.

따라서 오구라 컬렉션에는 우리나라 선사·삼국시대 무기와 장신구를 비롯해 회화, 조각, 공예, 복식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재들이 망라돼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선 한 번도 출토된 적 없는 5~6세기 신라 금동투각관모, 그리고 한국 고대 회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청동기시대의 견갑형 동기(어깨에서 팔꿈치까지 보호하기 위해 청동제로 만든 갑옷 부속품) 등 국보급 유물이 포함돼 있다.국내 문화재 전문가들은 오구라 컬렉션 중 상당수는 불법적으로 반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갑옷·투구 학술적 의미 대단" 왜와의 관계 밝히는 단서

/김영민 울산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2014-01-20 [09:31:17] | 수정시간: 2014-01-20 [14:30:03]

 

 

1981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오구라 컬렉션' 유물 1천여 점이 기증되었다.

오구라 컬렉션은 일본인 사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에서 불법으로 밀반출한 중요문화재들이다.

이 가운데 부산 연산동 고분군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유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삼각판병유판갑옷, 차양투구, 비늘갑옷 조각들, 철제관모, 원두대도 등이 그것인데,

이 유물 중 갑옷과 투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삼국시대 갑옷과 투구의 존재를 알린 유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대단히 의미가 있다.

삼각판병유판갑옷은 띠 모양의 철판으로 골격을 갖춘 후, 여기에 삼각형의 철판을 재단해 못으로 결합했다.

이런 모양의 판갑옷과 차양투구는 5세기 중엽 이후 왜에서 유행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착용성이 탁월한 비늘갑옷이 유행이었다.

실용성이 떨어지는 왜제 유물이 연산동 고분군에 묻힌 것은 연산동 고분군을 만든 집단과 왜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연산동 고분군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 무렵의 대형 무덤들과 함께 같은 시기의 석곽묘들도 조사되었다.

복천동 고분군 이후 부산지역의 대외관계와 정치적 동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연산동 고분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