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동 고분군 베일을 벗기다] 4.
'복천동 고분군'과의 관계
온천천이 가른 연산동·복천동 고분군 같은 듯 다른 듯
▲ 연산동 고분군 M10호 부장갱 출토 대호(큰 항아리). 부곽의 석곽 바닥 모서리에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바닥이 둥근 대호를 놓았다. 이와 같은 형태는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의 큰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
[부산 유일의 고총고분군]인 연산동 고분군은 온천천을 사이에 두고
가야의 또 하나 유력 세력 중 하나였던 복천동 고분군과 마주하고 있다. 두 고분군은 사이에 강이 가로놓여 있어도 같은 들판을 바라보는 같은 생활권에 속하는 유적이다.
그렇다면 이들 [두 고분군]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 두 고분군 유사점
우선 묘지를 놓고 보면, [수혈식 석곽]이라는 점이 닮았다.
또 석곽이 모두 지하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구덩이를 깊게 파고 그 안에 돌로 곽(槨:관(棺)을 넣는 궤)을 만들고
[뚜껑돌]을 거의 지표면 높이와 같게 놓았다.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 홍보식 팀장은
"연산동 고분군이 조성된 비슷한 시기에 대구 경산이나 다른 여타 영남지역 석곽들은
석곽의 윗부분이 지상 위로 올라온다.
하지만, 연산동 고분군은 복천동 고분군처럼 지하식을 유지하고 있다.
이점에서 연산동 고분군이 복천동 고분군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하나 [닮은 점]은 '충전 공간'이다.
[복천동 고분군]의 석곽들은 묘광(구덩이)과 벽석 사이가 넓다.
이게 소위 '충전 공간'인데, 복천동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연산동 고분군]도 이 공간의 폭이 50~100㎝ 정도로 상당히 넓다.
지하에 무덤 둔 수혈식 석곽은 유사
말갑옷·갑주 쏟아진 것도 닮은 점
대규모 봉분 존재 여부는 차이점
복천동은 전통, 연산동은 변화 지향
4~6세기 부산 변화상 추적할 유적
[연산동 고분군] M10호분의 경우, 부곽의 바닥 가장자리에 구덩이를 깊게 파
그 안에 대호(큰 항아리)를 설치하고, 작은 유물을 넣었는데 이 또한 [복천동 고분군]과 닮았다.
부곽 가장자리에 직경 1m 내외, 폭 50~100㎝ 정도 깊게 파 항아리를 넣고 항아리 안쪽과 주위에
여러 종류의 토기를 부장한 양상이 [복천동 고분군]이나 [연산동 고분군]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결국, 연산동 고분군과 복천동 고분군이 묘의 구조와 형태뿐만 아니라 유물의 부장 모습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연산동 고분군 M8호분 주·부곽 모습. 긴 네모꼴의 구덩이 2개를 깊게 파고, 주인공을 매장한 주곽과 부장품을 넣은 부곽을 따로 만들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은 구조이다 |
이뿐만이 아니다.
갑옷, 투구, 말갑옷과 같은 [무구류]들이 연산동이나 복천동 고분군 모두 무더기로 부장돼 있는 것도 닮았다.
영남지역을 놓고 봤을 때 [삼국시대 무덤]에서 갑옷과 투구, 말갑옷 등이 가장 많이 나온 고분군이
바로 복천동 고분군이다.
연산동 고분군 역시 이에 못지않게 이런 유물들이 쏟아졌다.
홍 팀장은 "연산동 고분군과 같은 시기에 영남지역 다른 고분군들, 예를 들면 함안 도항리 고분군, 창녕 교동,
송현동 고분군이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는 갑옷이 간혹 부장되지만, 사람의 갑옷과 투구, 말 갑옷과 투구 등이 무더기로 부장되어 있는 경우는 연산동 고분군과 복천동 고분군뿐이다"고 설명했다.
■ 두 고분군 차이점
[두 고분군]은 닮은 점만큼, 다른 점도 많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연산동 고분군의 경우 복천동 고분군엔 없는 대규모 봉분이 있다는 점이다.
연산동 고분군보다 앞선 시기와 같은 시기에도 분명 큰 고분은 있었지만,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봉분이 확인되지 않았다.
복천동 고분군의 경우 무덤의 봉분 높이는 기껏해야 1m 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겨우 무덤이 있다는 것만 나타낼 정도의 봉분이었다.
무덤을 만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봉토가 무너져 흘러내릴 정도로 봉분을 쌓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산동 고분군]은 달랐다.
무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과시성을 드러내는 크고 높은 봉분을 만들었다.
그렇게 봤을 때, [복천동 고분군의 축조기술]과 [연산동 고분군의 축조기술]은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대형 무덤을 만드는 새로운 기술이 수용되지 못했다면,
연산동 고분군에서는 새롭게 고분을 축조하는 토목 축조 기술이 수용됐던 것이다.
홍 팀장은 "복천동 고분군은 앞 시기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면, 연산동 고분군은 새로운 토목 기술들을 수용해 큰 봉분을 만들어 나갔다는 점이 다르다. 연산동 고분군의 경우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게 빨랐던 셈이다.
사실, 이게 연산동 고분군과 복천동 고분군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차이점은 토기에서도 발견된다.
[복천동 고분군]은 본래 금관가야의 토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가,
5세기 전반부터 조금씩 신라 토기적인 요소들이 부분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적으로 전통적인 면을 고수한다.
반면, [연산동 고분군]은 복천동 고분군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토기들이 만들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그 토기들은 주로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보이는 토기적 요소들을 표현하고, 모방했다.
이를테면 항아리의 형태나 토기 표면 장식 문양들이 그렇다.
신라 중심에서 유행하는 토기의 형태와 무늬를 받아들인 것이다.
부산대 고고학과 김두철 교수는 "이 무렵 경주가 영남의 최강자이자 중심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므로
선진문물을 동경한 각지의 수장들은 그것을 표본으로 삼아 모방하거나 자기화하고자 하였다.
그런 점에서 연산동 고분군의 세력들은 적극적으로 경주의 문물을 수용한 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두 고분군이 형성된 5세기 후반은 전통과 새로운 집단이 혼재하는 형국이었던 셈이다.
■ 문화 계승 및 수용의 모델
현재 국내 대부분 [국가 사적지]로 지정돼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을 보면
한 시기의 문화양상만 나타낸 게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양산 북정리 고분군은 6~7세기대, 창녕 교동 송현동은 5~7세기의 문화양상을 나타낸다.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 사이에는 별개의 집단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성이 많다.
다만, 몇 가지 문화적 차이점도 있어 5세기 이후 후반부터 기존 세력이 분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두 집단은 전혀 다른 집단이 아니란 것이다.
따라서 이를 놓고 보면. 복천동과 연산동 고분군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앞 시기의 문화적인 양상과 뒷 시기의 문화적 양상을 보여준다.
홍 팀장은 "두 고분군은 동래 일대, 온천천 일대를 포함한 4~6세기 후반의 부산지역 지배세력이 어떻게 분화되고, 문화가 어떻게 계승되고, 새로운 문화가 어떻게 수용되면서 변화해 갔는지를 구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고분군이다. 다시 말해, 삼국시대 특정 지역에서의 지배 세력 분화 및 전통 문화의 계승과 새로운 문화를 수용해 자기화해가는 문화 변천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연산동 고분군 역시 국가 사적지로 지정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사진=부산박물관 제공
'복천동 묘역' 부족하자
'연산동으로 옮겨' 축조...
/김두철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
영남지역에 고대국가가 성립하는 [3세기 말]에서 고구려군의 남정(南征·400년)이 있기까지의 [4세기]대에는
김해의 대성동 유적과 부산 동래의 복천동 유적은 절대 강자이자 당시 쌍웅을 이루었던 집단의 왕 묘역이었다. 이들이 활동하던 낙동강 하구지역을 중심이라고 한다면 당시의 경주는 주변에 해당한다고 할 정도이다.
5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힘을 빌린 경주의 [적석목곽묘 조성] 세력이 급성장하면서
대성동의 금관국은 몰락하고, [복천동] 세력도 얼마 동안은 경주에 선진문화 전수자의 임무를 수행하나
5세기 후반대가 되면서 그 역할도 급격히 쇠퇴한다.
이런 5세기 후반대 무렵, 복천동에서는 구릉의 정상부에 순차적으로 조성되던 수장묘역이 10·11호분으로
끝나고, 이후 대형 무덤들은 기존의 수장묘들 사이의 공간이나 주변 사면부에 조성됐다.
또 인근 배산 아래(연산동) 구릉 정상부에도 대형의 [고총고분]이 축조되기 시작한다.
양쪽 고분군의 대형무덤들은 종래 다른 구덩이에 축조됐던 주곽과 부곽이 모두 석곽묘로 바뀌고
하나의 묘광 안에 축조된 형태다.
또 단독석곽묘의 경우도 부장품용의 구덩이를 마련하는 등 앞 시기의 전통을 계승·발전시켰다.
결국, [두 고분군]은 장사지내는 예법을 같이하는 하나의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두 고분군에서 대형무덤들의 석곽 규모를 비교하면,
[연산동의 고총고분]이 같은 시기 [복천동의 대형무덤]보다 우월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산동 고분군의 주체세력이 복천동에서 수장묘를 축조할 묘역공간이 부족하자
연산동으로 묘역을 옮겼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양 고분군 간에는 수장권(首長權)의 계승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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