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이야기 공작소 <17-3> [남구 비화(秘話)]- 부경대 '워커하우스' 유래

금산금산 2014. 11. 22. 12:56

이야기 공작소 <17-3>

[남구 비화(秘話)]- 부경대 '워커하우스' 유래

 

 

돌담집 파란눈의 장군, 풍전등화 대한민국을 구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임시 사령부 건물로 쓰였던 '워커하우스'.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에 있는 이 돌집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부경대 제공

 

 

 

6·25 전쟁 때 참전한 美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머물며
최후 보루였던 낙동강전선 지휘본부 역할한 역사의 현장
18일간 치열한 전투, 방어선 끝까지 사수하고 반격 물꼬 터
목숨 바쳐 대한민국 지켜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영웅



몇 년 전 한통의 뜻 깊은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워커대장추모기념 사업회'회장이라고 소개하면서

부경대학교워커 장군의 숙소로 사용한 장소가 있으니 한 번 보러 학교로 오겠다는 전화였다.

대연캠퍼스 종합강의동 동쪽에 돌집이 한 채 있는데

나는 이곳을 한국전쟁 때 통신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방호 건물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높이는 6.45m, 면적은 303㎡ 가량의 거칠고 두꺼운 돌벽으로 된 건물이

워커 장군과 인연이 있는 곳이라는 전화에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적 침투 방지와 보안을 위해 두께 1m 정도의 방호돌담을 쌓아 지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이곳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존재하는 지 궁금해졌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 남침 개시 수 시간 후에 미국의 요청으로 급거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극동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고

7월13일 미 8군 사령부가 한반도로 파견되었다.

그 당시 미 8군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이 바로 워커 장군(Walton H. Walker·1889∼1950)이다.

전쟁 중 미 8군 사령관은 미극동지상군 사령관을 겸임하여, 참전한 16개국 연합군 작전을 지휘하기도 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6·25전쟁사'(5권)의 전쟁 연표에는 '1950년 9월 6일 미 8군사령부 부산수산대학에서 업무 개시' 기록이 나온다.

부산수산대학은 현재 부경대학교의 전신으로 대학 건물은 전쟁 직후부터 1957년까지 7년간 징발돼

전쟁 부상자 치료를 위한 미국과 스웨덴 야전병원으로 사용된 전쟁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 곳이다.

또 부경대학교에는 미군이 전쟁 때 임시 사령부 건물로 썼던 '워커하우스'가 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와

낙동강 방어선(일명 워커라인)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통신장비를 보호하려고

대구의 미8군 사령부를 1950년 9월 6일 부산수산대학교로 옮겨 전장을 진두지휘했다.



■ 전쟁 발발로 '미군 야전병원'으로 징발된 부산수산대 학교 건물

전쟁은 개연성과 우연성이 교차하는 예측 불가능한 영역으로 군 작전을 지휘하는

사령관의 리더십이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적군의 위치와 지형, 전쟁 지역의 기후, 전투인력 배치와 이 모든 상황을 헤아리는 통찰력과

전문적 군사 지식 등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용기와 투철한 의지만이

전장의 위기를 이겨내는 힘이 된다는 것을 한국전쟁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얻게 된 교훈이다.

치열했던 6·25전쟁 초기.

북한 인민군은 6월 25일 새벽 휴전선 전 지역과 동해안 11개소에서 일제히 포문을 열고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 인민군이 남침을 감행한 지 불과 사흘만인 28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

한강 방위선마저 무너지고 한국 정부는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쫓겨났다.

북한 인민군이 전황을 시종 압도하면서 국군은 끊임없이 뒤로 밀리고만 있었다.

유엔은 유엔군의 한국파병을 결의했다.

16개국의 유엔 회원국이 한국 파병을 자청했다.

7월 7일, 유엔은 유엔군 사령부의 지휘권을 미국 사령관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의 뒤를 이어 16개국의 참전국 부대도 유엔군 자격으로 부산항을 통해 한국에 상륙했고

막대한 보급물자들이 부산항에 속속 도착했다.

전쟁으로 부산지역 각 학교 교사는 군용으로 징발되었다.

유엔군 참전으로 7월 20일, 부산수산대도 제103 미군 야전병원에 학교 교사를 비워주어야만 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대연동 캠퍼스가 아닌 영도에 지어진 열악한 환경의 바라크라는

가교사에서 공부해야만 했다.

 8월 18일, 정부 기구가 부산으로 이전을 완료하면서

부산은 임시수도로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도시가 되었다.

대규모 피난민들도 부산으로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 가장 치열했던 6·25전쟁 18일 동안 미 8군 사령부였던 '돌집'

북한 인민군은 승승장구로 남진, 7월 말 마침내 낙동강 강변에 포진했다.

이후 낙동강을 건너려는 북한 인민군과 전선을 사수하려는 유엔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다.

유엔군은 낙동강의 자연적 방어선을 이용하여 활처럼 굽어진 반호형(半弧形)의 방위선을 형성했다.

이 때 유엔군을 진두지휘한 인물이 미 8군사령관인 워커장군이었다.

워커 장군은 포항부근의 해안을 북쪽 경계선으로, 진주와 마산 지역을 남쪽 경계선으로 하는 방어선을 그었다.

그리고 모든 전선의 한국군과 미군에게 8월 1일까지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렸다.

낙동강의 거의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은 맹렬하게 공격했다.

북한군은 1개 전차사단과 9개 보병사단을 투입하고 추가로 3개 보병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

하지만 우리 국군과 경찰, UN군 모두가 단결하여 전후방에서 전투에 참전,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무기를 들 수 있는 학생들은 학도병 또는 학도 의용군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전쟁 노무자로 방어선 전투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9월 4일, 미 8군사령부 참모들은 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데이비드슨 라인(Davidson Line)으로 후퇴하자는

논의까지 벌였으나, 그날 밤 워커 장군은 이를 철회했다.

대신 9월 6일, 미 8군사령부만을 대구에서 부산수산대학으로 이동하였다.

이 당시 대한민국의 운명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한국전쟁 역사지인 'U.S Army in the Korean War'에 따르면, 미 8군 사령부를 부산수산대학으로 옮긴 이유는

텔레타이프 통신장비를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 

미군 사령부의 통신장비가 적에게 파괴되거나 빼앗겼다면, 극동지역에서는 그것을 대체할

유사 장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부경대 돌집이 벙커처럼 지어진 이유도 바로 여기 있었던 것이다.

1개월 반에 걸친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망명 정부 수립을 논의할 정도로 위급했다고 전해진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냄으로써 국군의 반격작전은 물론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의 발판을 제공하여

6.25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워커 중장은 낙동강 전투에서 고군분투하는 휘하 지휘관에게 더 이상 증원군도 없고

더 이상 후퇴할 곳도 없다면서 한국 장병들에게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의지를 천명했다.

미국 장병들에게는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워커 장군이 이 때 말한 "지키느냐, 아니면 죽느냐(stand or die)"라는 명언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워커 장군의 굳은 의지는 결국 증원병도 없는 상태에서 낙동강전선 일명 '워커 라인'을 성공적으로 사수하여

전세를 만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 작전은 지금까지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이튿날 워커의 병사들은 부산 방어권을 돌파하여, 인천에 상륙한 군대와의 연계를 위한 경쟁을 시작하였다.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은 허둥지둥 북쪽으로 달아났다.

9월 24일 전세(戰勢)의 전환에 따라서 미 8군사령부도 부산수산대에서 대구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이처럼 부산수산대의 돌집은 워커장군과 그 참모들의 숙소이자 6·25전쟁의 가장 위급한 상황에 놓였던

18일간의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진두지휘한 지휘소 역할을 수행했던 역사적인 현장인 것이다.

사학과 이승명 명예교수는 "미 8군사령부가 부산수산대학에 머물렀던 기간은 18일 동안인데 워커 장군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왜냐하면 이 기간에 낙동강 방어선은 가장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고 그는 아마도 전쟁의 현장을 떠날 겨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워커 장군의 리더십의 진가, 판단은 신중하게 결정은 단호하게!

월턴 워커 (Walton H. Walker ) 1889 ~ 1950

월튼 워커는 1912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7월 7일 일본 도쿄에서 대전에 도착해

13일 정식으로 미 8군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워커는 기본적인 낙동강 방어 전략을 '기동방어'에 뒀다.

즉 취약한 방어선에 예비 병력이나 인근 부대의 병력을 차출하여

긴급투입 함으로써 병력의 열세를 커버하는 작전을 펼쳤다.

워커가 전장의 최일선을 자주 방문 하였던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현황 파악'과 '장병들의 사기 진작'. 즉 지휘관인 장군이

일개 병사와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워커는 늘 말하였다고 한다.

 그가 일선에서 지휘한 결과, 전시상황의 정보망을 책임지는

참모보다 방어권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최격전지에는 어김없이 나타나서 맹렬한 총탄 세례를 피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부대 작전을 진두지휘하였던 것이다.

그가 받은 세 개의 은성무공훈장 사유서에도 그의 진두지휘와 탁월한 기동작전이 언급되고 있다.

워커가 지프차에 서서 지휘할 수 있도록 별도 제작된 손잡이를 잡고

낙동강 전선을 미친 듯이 누비고 다녔던 사실은 인구에 회자되는 일화이다.


2차 대전 때 미 3군 사령관이었던 패튼 장군은 그에게 '더럽게 잘 싸우는 녀석'이라는 애정 어린

칭찬을 보냈으며 미 육군의 어느 장군보다도 워커를 더 높이 평가하였다.

'잊혀진 영웅, 월튼 워커'에는 그의 프로필이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맨 처음 믿을 수도 없고, 서글프기도 했으며, 아주 인기도 없었던 몇 달간의 전쟁에서 한국을 구했던 것은

그의 개인적 능력, 끈덕진 에너지, 지칠 줄 모르던 고집이었다.

워커의 뚜렷한 통솔력이 없었더라면 미합중국은 한반도를 떠났을 것이다'.


낙동강 교두보까지 밀렸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뒤 기세 좋게 북진했지만

중공군에게 밀려 다시 후퇴를 거듭하던 1950년 12월 23일, 워커 중장이 불행히도 돌연 사망하는

애석한 일이 생겼다.

그는 이날 미군 제 24사단에서 중대장으로 복무 중인 25세의 대위인 아들 쌤 심스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직접 달아주기 위해 식장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가 탄 차량은 의정부 축성령 고갯길에서 한국군 차량과 충돌하여 현장에서 순직하고 말았다.

그 사흘 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고 맥아더 원수는 대장 승진을 며칠 전에

상신해놓은 상황이었다.

이승명 교수는 "제 1차 대전 때는 대대장으로 프랑스 전선에서, 제 2차 대전 때는 군단장으로서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민첩한 작전과 용맹으로써 명성을 떨쳤던 그가 사고사로

                                  42년간의 군대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 그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지켜낸 평화를 기억하기 위하여

 

전후 우리나라는 전쟁의 상처를 딛고 세계 속에 당당한 자유국가의 위상을 지켜내며 도약하고 있다.

그 초석을 다져주었던 워커 장군.

그를 기려 서울 성동구 광장동, 그가 지켜낸 민족의 생명수와 같았던 '한강'이 굽어보이는 언덕에

미군 휴양지가 만들어졌고, 그곳에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워커힐'이라는 호텔이 세워졌다.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워커힐 호텔 본관 정면에 세워진 그의 추도비문에는 그의 결단과 신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을 구하는 데 큰 공훈을 세운 워커 장군.

7월 7일 한국 땅에 와서 안타깝게 숨지기까지 5개월 반이라는 시간 동안 그가 머무르며 숨가쁘게 지켜낸

낙동강 전선.

그 강줄기를 따라 면면히 흘러온 우리나라의 번영과 평화 공존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현장에서

그의 정신을 다시 만나고 싶다.

장군이 부산에 머문 시간은 단 18일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 18일 동안의 결정과 신념이 오늘의 우리나라를 있게 했다고 생각하면, 문득 이 '돌집' 앞에서

숙연해진다.

그와 함께 우리나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청춘을 영원히 바친 장병들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 모두가 목숨걸고 지켜낸 평화의 의미를 되새김할 수 있는

추모 기념비가 부산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돌집 건너편에, 21세기 평화의 나라 대한민국의 청년으로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작은 광장 이름은 '파라다이스'다. 오늘의 청년들이 자신의 멋진 이상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하늘을 선사해 준 워커 장군이

 자신의 소명을 다하면서 우리 청년들에게 선사한 귀한 선물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워커장군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사고에서 살아난 당시 보좌관이었던 짐 하우스맨회고록

우리를 더 많이 반성케 한다.

'미국은 한 도시에서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한 '미국의 희망'들을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보냈다.

 교수들도 참전해 더러 전사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학도병들이 전사했다.

한국의 어느 학교에도 전사 학도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지나는 자들의 머리를 숙이게 하는 표지는 없다.

존경하는 소대장님, 용감한 대대장님, 그리고 생명을 던져 진지를 지켜낸 병사들의 얘기는 입으로만 전해질 뿐

그들을 기릴 수 있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은 전후 팔을 잃은 국회의원, 눈이 날아간 국방장관을 갖지 못했다.

행사장이나 연회장 같은 데서 한국전 전상자들을 만나 본 적도 없다'고 적고 있다.

내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던 김이진 '워커장군기념사업회' 회장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아무도 그에 대해 알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 추모사업을 시작했고 1979년부터 자신의 개인재산을 털어

추모사업을 해오고 있다고 했다.

그 분은 워커 장군에게 선물 받은 계급장을 간직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나이가 많으니 이 사업을 계속할 분이 있으면 그분에게 그 계급장을 전해 주겠노라고 하셨다.

워커하우스를 둘러보시고 서울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면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1990년 큰 화재를 입고 복구된 부경대학교 돌집이 영영 사라지기 전에,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워커 장군을 비롯하여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에 대한 감사를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서

이곳을 평화 교육관으로 보존하고 활용하는 일이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채영희 부경대 교수

※ 공동기획: 부산남구청,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