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이야기 공작소 <17-2> [남구 비화(秘話)]- 잊혀진 '용호동 분개염전'

금산금산 2014. 11. 15. 09:57

이야기 공작소 <17-2>

[남구 비화(秘話)]- 잊혀진 '용호동 분개염전'

 

 

수백 년 이어오며 민초들 삶을 녹여온 부산 최대 소금밭

일제 땐 수탈 아픔…산업화·개발에 밀려 흔적조차 사라져

 

 

 

일러스트 = 서상균 기자

 

 

 

- 여말선초 때부터 이미 염전 개발
- 19세기 소금굽던 가마 31개 존재
-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침탈·독식
- 세금 매겨 식민지 경영 재원 사용
- 생존 터전 잃은 조선인과 충돌도

- 해방 후 생명력 되찾아 잠시 활기
- 1960년대 서해 천일염 생산 늘며
- 사양길 접어들자 넓은 염전 매립
- 공장 아파트 등 잇따라 들어서고
- 이젠 거대한 콘크리트로 뒤덮여


 

■ 사라진 '분개 염전'을 아십니까

용호동의 아파트 단지는 수영만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경관 탓에 부산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광안대교나 신선로 쪽에서 용호동을 바라보면 바닷가 주변 경관을 고층 아파트들이 장악하고 있다.

현재의 용호동은 아파트 숲으로 가려 있고, 거리는 온통 아스팔트와 차량으로 덮여 있어

과거의 모습을 전혀 가늠할 수 없다.

이곳에 오래 살았던 주민들조차 아파트 단지 아래에 식생활 문화의 중요한 터전이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직 분포 고등학교, 분포 우체국 등 지명을 통해서 아파트 숲에 가려진

소금밭의 추억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과거 속으로 한걸음만 더 나가면 아파트 단지에 매립되었던 거대한 염전을 볼 수 있다.

1960년대 초반 이곳이 매립되어 택지로 변화하기 전까지

용호동은 육지 쪽으로 둥그렇게 바다가 파고들어간 전형적인 만(灣)이었다.

이 만을 따라서 분개 혹은 분포 염전이라 불렸던 부산의 가장 큰 소금밭이 수백 년 이상을 버티고 있었다.

그 과거는 용호동 토박이들의 추억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들은 용호동의 과거를 위압적인 고층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부경대학교에서 섶자리까지 이어졌던 아름다운 바닷가와 한적한 염전을 회상한다.

수업을 끝내고 바닷가와 염전 사이 둑길을 걸어오며 장난을 치던 학생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 동래의 으뜸 소금밭, 분개

1946년 용호동 염전 모습.

부산남구청 제공

조선시대 동래에 관한 고지도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현 용호동 일대에

 '분포(盆浦)'라는 지명을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분포는 '분개'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여기서 '분(盆)'소금을 굽던 가마를 뜻한다.

조선시대 염전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 소금물을 조리던 가마이다.

가마를 뜻하는 '부(釜)'나 '분(盆)'이 들어간 지명이 있다면

염전 자리로 추정해도 무방하다.

이 지역의 구전에 따르면 약 400년 전, 대연동 석포 마을 동쪽에 소금밭을 처음 개발하였으며,

 이곳을 '사분개(四盆浦)'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래 부경대학교 자리에 있었던 넓은 갯벌에 염전을 조성했는데 바닷물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적 매립이

이뤄졌으므로 점차 염전이 용호동 쪽으로 옮겨갔다.

당시 용호동은 민가가 거의 없었고, 소금을 굽던 가마만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분(盆)이 있던 포구'라는 의미의 분개도 이런 배경에서 생겨난 지명이다.

최소한 여말선초부터 이 일대에 소금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의 자료인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동래현 남쪽에 염소(鹽所)가 1개 있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동래의 남촌(南村) 즉, 현재 부산시 남구 일대는 동래 지역 소금 생산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세기 발간된 '동래부읍지'에서는 동래 지역에 65개의 소금가마가 있는데, 그중 31개가 남촌에 있다고 하였다. 거의 반에 가까운 수치이다.

이 남촌에서도 역시 분개 염전이 대표적 소금밭이었다.

1907년 편찬된 '염업조사'에서는 약 2만 평의 용호동 소금밭에서 310t소금이 생산되었음을 기록하였다.

조선시대부터 근대시기까지 분개 염전은 부산의 으뜸 소금밭으로서 지역 주민이 일용할 소금을 계속 공급해왔다.

 


■ 분개염전의 염부, 윤유만 옹

10여 년 전, 분개 염전을 조사하기 위해 제보자를 수소문하던 중

나는 운 좋게도 용호동 사회복지센터 앞에서 윤유만 옹을 만났다.

12대 선조 때부터 용호동에서 산 토박이이자, 분개 염전의 염부로 일했던 그는

누구보다 사라진 분개 염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윤유만 옹은 당시 88세의 고령이었다.

그 옛날 용호동의 소금밭 시절을 물어보자 금세 추억에 젖은 목소리로 애기했다.

그는 분개 염전에서 감독을 맡고 있었던 부친으로부터 소금일을 배웠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보메'라는 염도계를 가지고 다니며, 소금물의 염도를 측정하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윤유만 옹은 분개염전에서 자염을 계속 생산했다며 힘주어 말했다.

"해방 후에 전라도에서는 태양으로 만드는 청염을 했지만 여기는 백염을 계속해서 했어"

그는 청나라에서 도입한 천일염을 '청염(淸鹽)'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 소금인 자염을 '백염(白鹽)'이라 불렀다. 내가 용호동의 자염 생산방식을 묻자 막힘없이 대답해줬다.

"여기 용호동은 전부 염전이었어. 염전 바닥에는 모래가 깔려 있지. 새벽에 수문을 열어 바닷물을 받았다가

오후 3시가 되면 모래에 소금간이 오르거든. 이 모래를 섯(소금물을 만드는 여과장치)에 모아두지.

바닷물을 여기에 부으면 아래에 간수가 모이거든. 이 물이 도랑을 따라 소금 공장으로 흘러가.

이 물을 솥에다가 받아두고 석탄을 넣고 계속 불을 때면 소금이 나오는 게지."

 

분개 염전 주위에는 사람 키로 한 길 반 정도 되는 제방이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돌로 쌓은 이 제방은 조수로부터 염전을 막아주기 때문에 만조 때에도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또, 그는 매우 중요한 제보를 해줬다.

일제강점기에 분개염전의 상당수를 일본인이 운영하였다.

그런데 일본인이 운영하는 염전은 한국식과는 달랐다고 한다.

 짠물을 받는 섯이 염전 복판에 있었으며, 아래에는 짠물의 통로인 '도깡(導管)'을 설치하였다.

이런 일본식 염전들은 언제부터 분개염전에 설치되었을까.

 

 



■ 구한말, 일제가 세운 염업시험장

용호동의 삼성시장은 작지만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지금은 흔적도 찾을 길 없지만 110여 년 전 일제는 삼성시장 부근에 염업시험장을 세웠다.

일제는 왜 용호동염업시험장을 설치한 것일까.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계획을 추진한다.

그 가운에 하나가 재정 고문 제도이다.

재정 고문은 조선의 경제를 장악하고,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파견하였다.

말이 자문을 해주는 '고문(顧問)'이지, 실제는 조선에 고통을 주는 '고문(拷問)'이었다.

 재정 고문이 눈여겨 본 것이 조선의 소금이었다.

소금은 식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식재료이므로 세금을 매기기에 좋은 세원이었다.

소금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제염업을 통제할 수 있다면 막대한 세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일제는 다각도로 조선의 염업을 개량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제염 기술의 변화를 꾀하였다.

일제는 인천의 주안에 대만식의 천일염 시험장을 설치하고, 용호동에는 일본식 제염방식을 도입한

전오염 시험장을 세웠다.

용호동의 분개염전이 지형과 토질 면에서 염업시험장을 세우기에 적합한 장소로 판단한 것이다.

1907년 일제는 분개염전을 시험장으로 선정하고, 총 7123평에 이르는 염전 공사에 착공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식 염전과 한국식 염전뿐만 아니라 양자의 절충식 염전을 설치하여,

소금의 품질과 생산량을 비교하였다.

구한말 용호동 분개염전은 식민지 재원 확보를 위한 제염업 시험의 교두보로 전락한 셈이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자 시라이 형제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분개염전을 차지하였다.

일본인들은 염전뿐만 아니라 용호동 앞바다의 목 좋은 어장들도 차지했다.

아베와 호시노 등 일본인들이 이기대 앞의 '목너머 어장'을 차지하고 마구 물고기를 잡아들인 탓에

용호동 어민들은 다른 어장으로 떠나야 했다.

1920년대 용호동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 간에 큰 싸움도 벌어졌다.

일본인이 집나간 소를 감추고 돌려주지 않자, 항의하는 조선인을 3

0여 명의 일제 헌병과 부랑인들이 무참히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 용호동의 주민들은 염전과 어장을 빼앗긴 채 큰 고통을 받아야 했다.

 

 



■ 대한염업조합연합회의 전설, 이규정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에 이규정과 박두상이 분개 염전의 주인이 됐다.

이규정(1899~1977)은 한국의 염업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좌천동에서 태어난 이규정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 울산으로 갔다.

울산에서 정미소와 고물상 등을 해서 돈을 번 이규정은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참가한다.

16명의 울산 인사들과 함께 울산 신간회를 조직하였고, 울산공립농업학교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1930년대 그는 돌연 만주로 떠난다. 만주에선 농장을 경영하고, 청년 계몽운동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토박이들은 해방 후에 이규정씨가 두루마기 하나 입고 와서 맨손으로 염전을 키웠다고 말했다.

해방 후에 남북이 갈라지자 남한 주민들은 소금을 구할 수 없어 고생했다.

일제가 대규모의 천일염전을 대부분 평안남도 광량만에 건설한 탓이다.

당시 이규정은 소금을 자급자족하고, 자주 경제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제염업을 주목했다.

그가 직접 짓고 항상 방에 걸어두고 보았다는 '국염증산가(國鹽增産歌)'의 가사에서 잘 나타난다.

이 노래의 1절은 이렇다.

'금수강산 삼천리에 광복 기쁨 넘칠 때 우리 생명 지켜주는

국산 소금 확보하고 자주경제 재건하여 조국경제 구출하자'.

염업인들에게 이규정은 거의 전설처럼 회자됐다.

천일염 전문가이자 전매국장을 역임했던 이봉희는'염전지(1957)'에서

'특히 이규정씨는 염업의 개량과 향상을 위하여 열심히 그의 포부를 토로하고,

재래식 제조방법을 지양하고 많은 연구와 과학적인 실험도 계속하였다'라고 평가했다.

이규정은 분개염전에서 자염 기술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는 한편, 대한염업조합연합회 창립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염업조합의 중앙기구인 대한염업조합연합회의 설립을 주도했으며,

1948년 창립 시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한국의 염업 발전에 헌신했다.

 


■ 소금장수요, 어디서 왔능교?

그러나 1960년대 분개염전은 생명력을 잃어갔다.

서해안에 천일염전이 많이 설치되어 소금 생산이 과잉되자 정부는 염전의 정리에 나섰다.

넓은 부지의 염전은 매립만 하면 다른 용도로 쓰기에도 좋은 장소였다.

1962년 분개염전에는 하수처리장이 건립되었으며, 1965년에는 동국제강이 들어섰다.

대기업이 들어선 이후에 분개염전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도 점차 잊혀졌다.

 

그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선 80대 토박이 어르신들이 계신 용호동 경로당에 가봐야 한다.

소금 광주리 이고 부산의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할머니들에게서 소금 장수의

경험담이 줄줄 쏟아진다.

어느 할머니는 영도까지 소금을 팔러 다녔으며, 또 한 할머니는 어린 딸까지 업고서

소금을 팔았다고 한다.

등에 업힌 어린 딸도 '소금 사이소'라고 외치며 한 몫 거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할머니는 분개 소금 장수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고 전해준다.

"소금 팔러 가면 사람들이 묻는다 아이가. 소금장수요. 어디서 왔능교.

분개에서 소금 이고 왔심더 하거든, 그라믄 바로 이리로 오이소 한다카이."

80대 할머니들의 기억 속에 아직 생생한 분개 소금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사

※ 공동기획: 부산남구청,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