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이야기 공작소 <17-4> [남구 비화(秘話)]- 향파 이주홍 '비 오는 들창'의 현장 대연동

금산금산 2014. 11. 30. 08:57

이야기 공작소 <17-4>

[남구 비화(秘話)]- 향파 이주홍

'비 오는 들창'의 현장 대연동

 

 

'못골'에 쏟아진 소나기, 한국 아동문학 최고봉을 빚다

 

 

 

 

그림 = 서상균 기자

 

 

 

1950년대 드넓은 들판이며 큰 못(淵)이 있었던 곳
물꼬싸움 벌인 농투성이…가뭄에 타들어가던 농심
향파 작품은 그때의 장면들 파노라마처럼 그려내
갈등·애환 씻어낸 큰 비는 희망이자 우리 삶의 방식
그 진가 제대로 반영·확산하는 후속사업 이어지길


향파 이주홍 선생의 단편동화 '비오는 들창'을 내가 완독하기는 작품이 발표되고 한참 지나서였다.

작품에 묘사된 배경이 일치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허물어진 성벽을 더듬어보는듯한 아련한 묘미도 없잖았다.

 그만큼 향파선생의 묘사력은 흡인력이 강했고, 마치 파노라마인양 그 소설의 장면들이 재생되었다.


향파 선생의 대표작이랄수는 없지만 '비오는 들창'남구 대연동의 50년대가 적나라하게 묘사 되었고,

지금도 못골 시장을 지나치다보면 그 때 물꼬싸움을 벌인 농투성이를 맞부딪칠 것 같은 착각으로 빠져든다.

향파 선생의 방대한 작품 목록에 '비오는 들창'은 꼭 끼어있다.

그만큼 저자 스스로 아주 심혈을 기울인 것임에는 분명한 명작이다.

대연동 일대는 '못골'로 불리어진다.

그래서 못골을 배경으로 한 아동소설의 명작·현장을 기리는 일도 매우 뜻이 깊다고 여겼다.

작은 표석이라도 세울만하다고 관심 있는 사람들 몇몇이 한 때 논의가 활발했었다.

그런데 향파 이주홍 선생이 워낙 비중이 높은 한국문단의 거목인지라 조형물의 규모도 거기에 합당해야 하고,

부경대학교에서 교수로 오래 봉직했었기에 허투로 할 일이 아니어서 흐지부지 돼 버렸다.

이나 저나 '비오는 들창'의 현장을 재확인해야겠기에 동화작가이면서 수필가인 김상곤(金湘坤)님과 향파 선생과는 동료로 각별한 친교를 가지셨던 부경대 명예교수 장수호 박사와 함께 부산수산대학 교수님들의 사택 마을

찾았었다.

거의 다른데로 이사했고 한 분만이 아직도 옛 사택에서 거주했다.

향파 선생도 사택 한 채를 배정 받았었다는 사실 말고는 '비오는 들창'에 관한 일화는 듣지 못했다.

사철나무가 우거졌고 고양이가 담을 넘는 여느 여념집과 다르지 않았다.

방문자가 '비오는 들창'을 되새길 도리 밖에 없었다.

벼포기의 메뚜기나, 가뭄이 들어 볏잎이 말려가는 어느 흉년을 떠올리며

비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농민의 안타까움을 상상할 수 밖에 없었다.

8년전 부경대 대연캠퍼스 교정에 설치된 이주홍 탄생 100주년 기념비.

국제신문 DB

'비오는 들창'은 여름방학 때 대연초등학교 학생들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역사극을 연습 하는 장면이 서두이다.

향파 선생께서 연극에도 깊이 관여해 희곡도 쓰고, 연출도 하였기에

방학 중에 어린이들의 연극연습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엉뚱하지를 않다. 그 중의 어린이가 자주 대사를 잘못 발음하여 지도교사의 꾸중을 듣는데

그 아이는 연극보다도 가뭄에 타들어가는 논이 자꾸 겹쳐져서인가 보다.

비오기 만을 기다리며 자꾸 쨍쨍한 하늘만 쳐다보며 먼눈을 팔았던 것이다.

논에서는 물꼬싸움이 대판으로 벌어졌다.

아랫배기의 주인이 윗배기 물을 빼어 자기 논에다 대었던 것이다.

윗배기 사람이 득달 같이 달려드는데 여편네들도 가만 있지를 않아

위아래 논주인들은 한데 엉켜 나뒹구는 것이다.

건장한 쪽에서 논구덩이에 상대를 패대기 쳐서 뻘투성이로 만드니 그 남자의 아내가 가해자의 불알을

움켜쥐어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이런 사생결단의 물꼬싸움도 시커멓게 몰려오는 소나기로 해갈이 된다.

이튿날 어느 한 집에 제사를 지내고 그때의 농촌 풍습대로 동네 집집이 제삿밥을 돌리는데

개돼지 같은 집구석에는 주지말라고 한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그러는 것 아니라며 제삿밥을 그 집에도 보내라고 타이르며 그까짓 물꼬싸움에

이웃간의 정을 버릴 수 없다고 나무란다.

아이들도 어른들이 서로 불구대천지 원수처럼 싸운 사실을 알고 있어 어색했는데

소나기가 해소해 주니 얼마나 시원했겠는가.

대강의 줄거리이지만 '비오는 들창'은 매우 시사성도 높을뿐더러 풍자가 백미이다.

'비오는 들창'이 아동소설의 명작 반열에 드는 것은 노련한 작가의 필력에도 있겠으나 농촌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농민들의 애환을 체득하지 않으면 씌어질 수 없는 쾌작이다.

또한 결말에 '소나기'가 내려 싸움의 원인이 사그라졌지만 제삿밥을 싸웠던 집에도 보내야한다는

 할머니의 생각에 큰 의미를 품고 있다.

바로 화쟁사상(和諍思想)아닌가.

제 아무리 각박한 세상일지라도 혼자 독과점하는 것은 비윤리이다.

오래 살아왔던 할머니가 이런 생각을 식구들에게 이르는 것은 그저 체면치례가 아니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자는 호혜상생주의 아니면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쾌거이다.

 '비오는 들창'을 빼어난 아동소설로 치부하는 뜻도 이러한 교시(敎示)성에 있다.

문학작품의 가치는 재미와 교육성이 잘 조화되어야 한다.

'비오는 들창'은 동화문학의 이 요소를 잘 포괄하고 있다.

웃음이 나오면서도 뭔가 가슴 뭉클한 감동은 후반부의 화해하는 장면인데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서사구조가 아주 견고하고 대문장가의 소설작법에 연유한다.

이러한 작품의 현장이 바로 남구 대연동이라 못골하면 '비오는 들창'을 생각하는 것은 결코 견강부회가 아니다.

작품은 작가의 정신적 산물이다.

향파 선생께서 살아오신 궤적을 훑으면 '비오는 들창'의 집필 의도나 배경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천재적 재능을 갖춘 향파 선생은 농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일본에서 고학을 하셨다.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육영사업도 하셨다.

문학뿐만이 아니라 미술에도 재능이 뛰어나 '비오는 들창'의 장면들이 마치 지금의 동영상 보다도 더 실감을

지닌 것도 이러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또한 연극에도 대단한 열의와 재능을 발휘했었는데 '비오는 들창'의 소재에도 연극이 등장한다.

연극이 바로 가장 호소력이 있다는 것을 진작 아셨던 것이다.

하여튼 '비오는 들창'의 무대가 대연동이고, 거기의 등장인물들이 대연동 주민이었다는 사실은

실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비오는 들창'이 한갖 농촌이었던 당시의 대연동을 묘사했다기 보다 거기에서 핍박 받으며 살았던분들의

애환이 스며 있고, 갈등을 품었던 사람들이 서로 아픔을 치유하는 인간애가 스며 있어

가히 한국 아동문학의 전범(典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오는 들창'은 오늘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웃음과 사랑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명작이다.

모름지기 그런 작품이 있었다는 사실이 문단사 한 줄로 홀대해서는 모자란다.

'비오는 들창'이야말로 대연동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농촌의 한 삽화일지라도 그 진면목이 바로 우리의

실상이었고, 희망이었음을 모두 알아야겠다.

 '비오는 들창'의 독자들이 많지 않다고 탓할 것이 못된다.

옥석(玉石)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유사품이 대량생산 되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오로지 명작에 대한

우리의 자세 문제일 뿐이다.

향파 선생의 문학적 발자취는 그와 연관 있는 곳곳에 산재돼 있다.

고향 합천에는 향파문학관이 개관해 있고, 부산의 동래에도 향파문학관이 있고 향파선생께서 교수로 봉직했던

부경대에도 조형물이 있다.

또한 향파 선생의 문학업적을 기리는 향파문학상과 이주홍문학상이 제정 되어 문학하는 분들께는

대단한 관심거리이다.

그러함에도 대연동 '비오는 들창'의 명작의 산실이 전혀 그림자도 비춰지지 않음은

향파 선생 선양사업이 너무 엄청나서일까.

향파선생께서 타계 한지도 어언 27년이 지났고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문단에서 추모행사를 했지만

선생께서 깊이 애정을 갖고 관여했던 부산아동문학계에서 꾸준히 벌이고 있는 향파 선생 묘소참배와

기념세미나 행사는 그닥 아는 사람이 많지않다.

향파 선생은 부산아동문학회를 창립한 주역이었지만 아동문학계가 양분되었을 적 노경에서도 그 통합의 중책을 마다하지 않고 새로 시작하는 부산아동문학인협회의 초대회장을 기꺼이 받으시기도 했다.

그만큼 향파 선생은 다방면의 대가이면서도 아동문학을 위해서 앞장서셨던 분이다.

그렇다고 향파 선생을 경모하는 분이 향파선생의 문하생만은 아니었다.

향파 선생이 문학계의 우뚝한 거봉으로 추앙을 받는 것은 향파 문학의 향기와 위력이다.

수양산 그늘이 감동 수백리를 적신다는 말씀이 실감난다.

해마다 봄이면 부산에 거주하는 아동문학인들은 향파 선생의 유택에 모여 그를 경모하는 묘제를 올리고

기념세미나를 한다.

동시를 쓰는 갈뫼 최만조 선생이 향파 선생 경모사업을 아동문학 진흥의 기틀을 잡자는 의도로 시작했는데

해가 갈수록 시민들의 참여도 많아 그야말로 문학대가로서 향파 선생의 향기는 바로

향원익청(香遠益淸·향기는 멀리 갈수록 맑음을 더한다)이다.

'비오는 들창'의 무대가 대연동이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향파 선생의 문학세계에 접근하는

방식으로서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우리의 현실적 갈등문제와 전혀 상관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비오는 들창'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인식하는 것도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이 작품은 힘있는자와 없는자의 대결이 아닌 그저 평범한 농민들의 일상적인 다툼이 크게 확산돼

이전투구가 되는 것이고 할머니가 화해를 종용하는 일이나 천우신조로 소나기가 쏟아져 해갈되는 결말은

참으로 명작으로서의 요건을 구비하고 있다.

그런데도 진가가 제대로 반영되거나 확산되지 않음은 실로 유감이다.

'비오는 들창'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한갖 문학인의 시각으로가 아니라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에서

화해상생의 큰 의미를 이 작품에서 체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대연동은 옛날 들판이었으나 지금은 부산 남구의 중심지번화가이다.

'비오는 들창'은 그저 흘러간 옛날을 되새기는 읽을거리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 화해상생의 현장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교과서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모름지기 명작에 대한 이해는 몇사람의 마니아로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그 진가가 더욱 빛을 뿜게하는 후속작업이 이어져야 한다.

'남구에는 못이 많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대연동을 비롯해 인근 각지에 못(池)과 관련된 지명이 수두룩하다.

 '못골'이라는 이름에서도 연상되어지고, 그 외 용(龍)이 많이 나온다.

모두 물과 못이 관련된다.

'비오는 들창'에도 논물과 소나기가 등장하고 저수지의 물을 대는 물꼬싸움에서 이야기가 전개 되고 있다.

'비오는 들창'에서 '남구에는 못이 많다'라는 연상이 가능하나 못을 못(淵) 아닌

못(釘)으로 바꿔치기해서 두 동강이가 난 물체를 못으로 잇게하는 역할을 나타내는 의미로

상정했는데 '남구에는 못(釘)이 많다'는 글쓴이의 상상력에 감탄했으나

아무래도 '비오는 들창'과 비교할 수는 없다.

이 명작이야 말로 가뭄에 목말라 시들어가는 농작물은 물론 우리의 메마른 가슴을 흥건히

적셔주는 생명수로서 '비오는 들창'에 방울져 흐르는 것으로 그야말로 활명수이다.

'비오는 들창'의 명작 무대가 우리 고을이었다는 사실이 자못 자랑스럽다.

김상남 아동문학가

※ 공동기획: 부산남구청,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